요즘 ‘갑질’이라는 용어가 세간에 자주 떠돈다. 자신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오너라는 신분을 이용해 아랫사람의 인격을 함부로 유린했다. 백화점에서도 자신이 VIP라는 점을 악용해 점원을 무릎 꿇리게 하는 일도 있었다. 어느 기업 사장은 ‘매 값’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 유행한 말은 ‘금수저 흙수저’였다. 몇 달 전에는 어느 대학생이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수저 색깔’이라고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기도 했다. 이런 몇 가지 단면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느낄 수 있다.
인류 역사 이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상류층과 하류층이 존재해왔다. 지금은 이성이 발달하고 민주주의가 발달한 21세기다. 평등을 부르짖으면서도 부를 가진 자와 명예를 가진 자들의 갑질이 자꾸 세상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유 불문하고 인간이 남 위에서 군림하려는 것은 탐욕이요, 어리석은 행동이다.
인도 석가모니 부처님 생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부처님이 사위성 시내에 탁발하러 나갔다가 동네 청년들이 막대기로 뱀 한 마리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목격했다. 부처님이 그들에게 물었다.
“나약한 생명체에 무엇을 하느냐?”
동네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뱀이 우리를 물을까 봐 막대기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너희가 해침을 당하고 싶지 않거든 너희도 다른 이를 절대 해쳐서는 안 된다. 만약 너희가 다른 이를 해친다면 너희는 다음 생에 행복할 수 없다. 자기도 행복을 추구하면서 다른 사람이나 존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우리가 이 점을 잊고 살고 있다. 나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듯 다른 이도 행복을 추구한다. 인간이 죽음보다 삶을 원하듯이 하찮게 보이는 애벌레·지렁이조차 삶을 원하지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에 견줘 봐도 그렇듯이 생명 가진 존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으며 상대가 나보다 약하다는 점을 악용해 함부로 해서야 되겠는가.
자,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한 생명이 존재하는데도 수많은 존재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서정주 선생의 ‘국화옆에서’라는 시에서도 국화 한 송이가 피는데 시간적으로는 봄의 소쩍새와 여름의 천둥이 있어야 하고 공간적으로 물과 바람·햇빛의 도움이 있었기에 꽃이 핀다. 불교 진리 중 연기설이 바로 이 가르침이다.
또 자동차 한 대가 굴러가려면 여러 부속품이 결합돼야 한다. 성공한 기업인도 마찬가지다. 부자가 홀로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자신이 얻은 기업의 CEO라는 직분도 자신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하층 노동자를 비롯해 중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혹 남 앞에서 군림하고자 한다면 그만의 도덕성과 인격을 겸비해야 한다. 그래서 영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지위와 명예만큼 도덕적 의무도 따라야 함을 주장한 것이라고 본다. 미국의 유명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본보기다. 그의 인생 전반부는 부를 축적했지만 후반부는 축적된 부를 사회복지와 교육사업에 투자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는 말을 남겼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라고 설파했다. 내가 귀한 만큼 남들도 귀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 이런 마음만 갖는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