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 자본확충 문제를 놓고 정부와 갈등을 빚는 것처럼 보였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중앙은행의 발권력 동원 원칙을 지키면서도 국책은행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으로 지난 2009년 본인이 직접 지휘했던 ‘은행자본확충펀드’를 내놓았다. 그동안 구조조정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피력했던 이 총재가 작심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에서 향후 정부와의 논의에서 어떻게 귀결될지 주목된다.
‘아세안(ASEAN)+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 중인 이 총재가 4일(현지시간) 기자들을 만나 2시간30분 이상 국책은행 자본확충 문제에 대해 중앙은행의 입장을 비교적 명확히 밝혔다. 발언의 파장 등을 고려해 절제된 언어로 일관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한은의 의사가 청와대·정부와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정도로 잘못 전달되자 이 총재가 작심을 하고 나선 게 아니냐는 것이 한은 내부의 해석이다.
이날 이 총재는 발권력 동원과 관련해 중앙은행의 원칙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 번째는 발권력을 동원하려면 국민이 납득할 만한 타당성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법 테두리 안이더라도 중앙은행의 지원금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 총재는 중앙은행이 나선 구조조정의 모범답안으로 꼽히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사례를 무엇보다 강조했다. 미 연준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AIG와 GE 등의 기업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대출해준 뒤 구조조정이 끝난 뒤 이를 모두 회수한 바 있다. 이 총재는 “만약 연준이 기업 지원으로 큰 손실을 봤다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며 반문했다. 현행법이 한은 금융통화위원에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은법 25조는 발권력을 동원했다가 손실이 나는 경우 금통위원에게 연대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총재는 이와 관련해 “금통위원들이 손실을 볼 권한까지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9년 본인이 직접 설계한 은행자본확충펀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자본확충펀드를 통할 경우 이 총재가 일관되게 강조해온 법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담보대출 방식이라 중앙은행의 ‘손실 최소화의 원칙’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국책은행의 구조조정용 실탄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확충펀드는 정부와 한은이 그동안 강조해온 ‘재정+통화’라는 폴리시믹스(policy-mix) 취지에도 맞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 연준도 재무부와 7,000억달러 규모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을 통해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을 ‘집도’했다. 이에 대해 정부에서도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방안”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이 총재는 직접 출자의 가능성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이 총재는 “손실 최소화 원칙 측면에서 대출이 부합하다는 건데 타당성이 있으면 국책은행 직접출자도 가능하다”며 “이와 관련해 미국 말고도 독일·프랑스·영국·네덜란드·스웨덴 등의 부실기관 자본확충 사례를 살펴보고 있는데 (협의체에) 다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한은의 한 관계자도 “출자 가능성이 아예 닫힌 것은 아니다”라며 “손실 최소화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출자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향후 협의체에서 이런 방식이 논의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프랑크푸르트=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