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문명이 사라지다 ... 로마 약탈



1527년 5월6일,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마제국의 후신’을 자처했던 신성로마제국이 왜 로마를 침공했을까. 교황과 황제의 대립, 유럽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해묵은 원한과 알력 탓이다. ‘로마’가 ‘로마’를 친 이날의 사건은 역사의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시대를 이끌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도 이로써 끝났다.

로마 진격의 전초전은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와 1525년의 파비아 전투.* 두 번 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북유럽과 영국,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서유럽과 중부유럽 전체가 합스부르크의 강역이었으니까. 할아버지 시대부터 시작된 수차례 정략결혼의 결과로 거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는 한껏 욕심을 부렸다.


먼저 친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위를 노렸다. 허울 뿐이었어도 서구세계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로마 교황 다음으로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는 자리. 선거로 뽑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할아버지에 이어 차지하려던 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도전받았다. 19세의 카를 5세보다 여섯 살 많았던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가를 극도로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스페인제국 견제를 위해 이교도인 오스만 투르크와 비밀 동맹까지 맺을 정도였다. 프랑수아 1세와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술레이만 1세는 동갑이었다.

선거 초반에서는 프랑수아 1세가 유리해 보였으나 결국 카를 5세가 이겼다. 돈의 힘으로. 세계최초의 다국적기업이자 당대 최고의 금융그룹이었던 ‘푸거’ 가문(Fugger family)에서 빌린 85만 플로린이라는 거금으로 뿌린 무제한의 뇌물이 통한 것. 선거전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져 19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연거푸 카를 5세에게 당한 프랑수아 1세는 이를 갈았다.

최초로 화승총이 승패를 결정한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도 패전해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프랑수아 1세는 동맹을 찾았다. 프랑수아 1세가 풀려나는 조건으로 약속했던 이탈리아 포기 무효를 선언하며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동맹을 맺자 분노한 카를 5세는 군대를 로마로 보냈다. 결과는 예고된 것이었다. 스페인군 6,000명과 독일 용병단 1만6,000여명으로 구성된 황제군에 비해 교황의 군사는 5,000명에도 못미쳤다. 패전의 와중에서도 스위스 용병들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교황의 생명을 지켜내 명성을 떨쳤다.**

황제군은 싸움이 끝난 뒤에도 로마를 철저하게 밟았다. 관례였던 약탈기간 3일보다 닷새 많은 8일간 마음대로 약탈했다. 점령기간인 6개월 내내 로마가 붙탔다고 한다. 독일 용병들이 광기 어린 약탈에 나선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 루터교 신자가 많아 가톨릭의 본산인 로마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고향 땅의 수많은 신교도 농민들이 죄없이 죽었던 독일농민전쟁 직후여서 복수심에 불탔다.

두 번째로 지휘부가 무너져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용병단장은 로마 진격 바로 전에 급사하고 스페인군 최고사령관도 초전에 전사해 약탈을 제어할 명령체계가 사라졌다. 세 번째로 보상 심리가 강했다. 카를 5세가 약속한 용병 급료가 제대로 안 나와 불만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병사들은 로마를 털고 찌르고 불태웠다. 로마의 민간인 4만5,000여명이 이 때문에 죽거나 집을 잃었다. 고대 로마로부터 내려져 온 건축물과 고문서도 불탔다. 410년께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했을 때보다 피해가 훨씬 컸다.

도시의 파괴를 넘어 로마문명의 자취를 쓸어버렸던 ‘로마의 약탈(Sack of Rome)’은 역사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종교 간 증오감이 커졌다. 참전수당을 약탈로 찾으려던 용병단의 중추가 신교도였다는 점 때문에 반(反)종교개혁의 공감대가 퍼졌다. 거액의 몸값을 내고 목숨을 건진 교황은 메디치 가문 출신 대공녀를 프랑스로 시집 보내는 등 프랑스와의 관계를 더욱 다졌다. 프랑스 역사의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위그노(신교도) 대학살도 메디치 가문 출신인 두 명의 프랑스 왕비가 주도했다. ***


교황의 패전은 영국의 종교까지 바꿔 놓았다.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시녀 앤 블린과 결혼하고 싶어 왕비 캐서린(스페인 공주 출신으로 형수였으나 형이 죽은 뒤 스페인과 관계를 의식해 형수와 결혼)과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교황에게 청원을 넣었다. 감금 상태였던 교황 클레맨스 7세는 카를 5세의 눈치를 살펴야 하던 처지. 카를 5세는 이모인 캐서린 왕비가 내쳐지기를 원치 않아 결국 교황은 이혼을 불허했다. 헨리 8세는 이에 반발해 1534년 수장령을 내렸다. 영국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 아니라 영국 국왕이라는 내용의 수장령으로 영국의 국교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뀌었다. 역사의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지만 아주 가끔은 사건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만들어준다. 로마의 약탈이 없었다면 영국의 역사와 종교도 요즘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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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525년 2월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Pavia)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파비아전투는 화승총이 본격 사용된 최초 전투로 손꼽힌다. 이탈리아 지배권을 둘러싼 이 전투의 시작 직전 병력은 프랑스 2만 3,500명 대 스페인 2만3,000명. 엇비슷했지만 내용에서는 프랑스가 앞섰다. 스페인보다 3배 이상 많은 53문의 대포를 보유한데다 승패를 결정 짓는다는 기병도 6,500명 대 4,000명으로 1.62배 많았다.

결과는 프랑스의 참패. 자신감에 가득 찬 프랑스는 새벽 5시부터 선공을 퍼부었으나 4시간 뒤 나타난 결과는 반대였다. 승리한 스페인은 500여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반면 프랑스군은 1만2,0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국왕 프랑수와1세도 포로로 잡혔다. 비결은 3,000명에 이르는 화승총 부대. 농민 출신 소총병들은 창병과 협력해가며 전신에 판금 갑옷을 두른 프랑스 귀족기사단을 괴멸시켰다. 요즘 가격으로 환산해 단가 600달러짜리 화승총이 수만달러짜리 중장갑 기병을 무찌른 것이다.

포로로 잡힌 프랑수아1세는 세는데만 4개월 걸렸다는 1차분 몸값 12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야 겨우 풀려났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기득권도 잃었다. 그러나 두 나라 경제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챙긴 스페인은 쇠락하고 프랑스는 힘을 되찾았다. 승리에 취한 스페인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탓이다. 산업기반도 인력부족으로 무너져 배상금은 프랑스 제품을 수입하는 데 들어갔다.

** 스위스 용병이 교황의 근접 경호를 맡기 시작한 시기는 1506년. 오늘날이야 손꼽히는 부자나라지만 당시 스위스는 척박한 산악지방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에 남자들은 일찌감치 국제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다. 계약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던 스위스 용병들은 교황의 군대가 항복한 상황에서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 교황을 안전지대로 피신시켰다.

교황청 근위대를 스위스군 전역자로만 뽑는 전통이 이때 생겼다. 당대 최고 재산가였던 메디치 가문 출신인 교황은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스위스 용병들을 각별하게 챙겼다. 용병을 근위대로 격상시키고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군복에 메디치가의 상징 색상인 노랑과 파랑색을 입힌 것도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우대한다는 애정의 표시였다.

요즘에도 스위스 근위대는 보초병뿐 아니라 교황의 근접 경호까지 맡는다. 병력이라야 110명에 불과한 스위스 근위대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군대다. 신참 병사의 월급이 우리 돈으로 200만원 정도인 스위스 근위대는 휴일이면 10만여명의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달러 박스다.

*** 메디치 가문 출신인 두 명의 프랑스 왕비는 발레와 프랑스 요리의 전파자로도 평가받는다. 메디치 가문의 눈 요깃거리가 발레로 발전하고 프랑스 요리의 형성에도 메디치 가문 출신의 왕비들이 데려온 요리사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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