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공허한 왕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연합뉴스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연합뉴스




셰익스피어 작품 중 ‘헨리 5세’라는 연극이 있다. 주인공인 왕자 할(Hal)은 영국을 승계해야 할 차기 대권 주자. 그는 아버지인 헨리 4세가 지닌 카리스마와 현명함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가 거리로 나가 불량배들과 어울린다. 아예 왕의 길을 포기한 것이다. 여인숙에서 몰락 기사 팔스타프 같은 이들과 맥주를 기울이며 도박을 즐기고, 별안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왕자 할의 모습은 철없는 일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할은 자신의 아버지 또한 불완전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버지 헨리 4세는 조카인 리처드 2세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콤플렉스를 가졌었다. 그리고 아들에게만큼은 평화로운 영국을 물려주고 싶은 희망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었다. 외롭게 늙어가는 군주의 그림자를 보았던 할은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후계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을 대표하는 성군 헨리 5세가 된다. 짧은 집권기였지만 훗날 역사가들은 그를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했던 왕으로 기억한다.


조직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 져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차기 권력은 현실 권력의 입장에서 경쟁자이자 훈육의 대상이다.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을 바라보는 감정이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다. 리더는 자신의 자리를 승계하는 것 말고도 수많은 현안을 책임져야 한다. 몸과 마음이 병들기 쉬운 운명이 지도자의 길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쇠약해져 후계자에게 뒷일을 부탁할 때 건네주는 왕관의 무게는 지극히 가볍다. 리더 본인이 이루어 왔던 치적은 먼 옛날의 역사로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상태에서 시작하는 미래 권력의 불안한 앞날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BBC는 셰익스피어의 국왕 이야기를 ‘공허한 왕관’(hollow crown)이라고 이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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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7차 노동당 당대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한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왕조를 물려받은 지 5년째 되는 해다. 그 사이 북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고, 끊임없는 핵 도발과 약속 위반으로 신뢰 수준이 땅에 떨어진 상황이다. 그 와중에 김정은은 36년 만에 노동당의 모든 대표를 선출하고 소집하는 자리에서 자기가 그린 가상의 ‘공화국’을 상징하는 왕관을 쓰려 한다. 별안간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김정일과 그토록 닮길 원하는 김일성이 그렸던 왕조의 이상과 얼마나 부합하는 일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김정은이 지금과 같은 군사적 기조를 유지하는 한, ‘공허한 왕관’을 무사히 물려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헨리 5세는 아버지의 늙음을 목도하고 나서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되려고 결심했다 한다. 왕관의 무게를 더하기 위해 핵 놀음을 하고 있는 누구와는 너무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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