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2일 청와대에서 연 ‘과학기술전략회의’는 연구개발(R&D) 지원정책을 철저히 민간 수요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한마디로 “연구할 맛 나게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이 행정업무에 시간을 빼앗기거나 규제장벽에 막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돕고 주도적으로 연구개발 사업을 제안해 관련 예산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정책들이 추진된다.
우선 연구비 집행기준이 대폭 바뀐다. 허용된 항목 내에서만 연구비를 써야 했던 기존의 ‘포지티브’ 식 집행기준을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꿔 명시된 금지사항만 아니라면 자유롭게 연구자금을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시범 도입될 예정이다. 또한 대학 등에 대한 연구자금 지원 시 돈의 집행 과정에 정부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대학 스스로 성과를 평가해 관리하도록 하는 ‘그랜트 지원방식’이 도입된다. 신진연구자들에게는 5년간 최대 총 1억5,000만원까지 주는 ‘생애 첫 연구비’ 지원 대상을 확대해 그 수혜율을 현행 60%에서 80%까지 늘리겠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연구원들의 행정업무 부담도 대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보통 100장 이상씩에 달하는 연구계획서를 제출해야 연구용 정책자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연구계획서를 받지 않기로 정부가 방침을 정한 것이다. 정부는 대신 5장 분량의 개념계획서만 연구자로부터 제출 받기로 했다.
◇정부 R&D 혁신방안
신진연구자에 ‘생애 첫 연구비’ 지원(10년 이상 장기 지원) |
그랜트 지원방식 도입, 대학이 스스로 성과 관리토록 자율성 강화 |
정부위탁사업 정책지정방식 확대, 출연금 지원 인건비 비중 70%로 확대 |
중견기업 전용 후불형 R&D지원 확대 |
연구행정 부담 대폭 완화 |
학생 인건비 통합관리 제도 개선 |
연구 부정 발생시 해당 연구기관 간접비 축소, 연구자에 대한 제재 조치 강화 |
모든 정부 R&D사업 ‘제로베이스(zero-base)’ 재검토 |
대학교수라면 제자의 월급 등 연구원 인건비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던 고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정부가 학생인건비 통합관리제도를 개선해 연구비 중 학생인건비 집행률 의무 기준을 현행의 80% 이상에서 60%로 완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연구성과 평가 시 양적 평가에 치우쳐온 기존의 기준을 질적 평가 중심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이뤄질 예정이다. 특히 기초연구사업의 경우 그동안 논문 수나 특허 수와 같은 양적 기준을 중심으로 성과 목표를 제시하던 방식이 앞으로는 점진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출연연구기관에 대한 인건비 지원 비중은 70%로 확대해 출연연구기관들이 연구원 월급을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불필요한 과제를 ‘뻥튀기’ 식으로 제안해 사업을 따내거나 과열 사업 수주경쟁을 벌이는 폐단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정부는 기초연구 분야에 대한 자금지원 규모도 올해 1조1,000억원 수준이던 것을 2018년에는 1조5,000억원 수준이 되도록 늘리기로 했다. 연구자들이 주요 주제에 대해 장기간 매진할 수 있도록 지난해부터 진행 중인 ‘한 우물 파기 연구’ 비율도 기존 10%에서 20%로 확대한다. 중견연구자사업에 대해서는 연구지원 기간이 현행 3년에서 향후 5년으로 늘어난다. 만약 우수 연구과제라면 후속 지원이 5년 동안 더 이뤄진다.
대기업들에 대해서는 필요한 연구 주제 및 연구비, 컨소시엄 구성을 스스로 먼저 제안하면 정부가 관련 연구비용을 분담해주는 ‘역매칭 지원방식’이 적용된다. 아울러 중견기업 전용 후불형 연구개발 지원이 확대돼 우수한 성과를 낸 기업에 보다 많은 투자가 이뤄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마련된다.
정부는 이처럼 지원을 늘리는 대신 책임 소재는 명확히 할 예정이다. 연구 부정행위가 발생할 경우 해당 연구기관에 대한 간접비 지원이 줄어들고 부정을 저지른 연구자에 대한 제재 수위가 높아진다. 또한 정부와 민간기업, 대학, 연구기관 간 연구개발에 대한 역할을 명확히 분담해 중복투자 등의 비효율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청와대는 강조했다.
비효율적인 연구개발 지원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구조조정도 단행된다. 출연연구기관들이 서로 백화점 식 연구를 진행해 비효율과 중복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출연연구기관별로 5개 안팎의 핵심 분야를 정해 해당 분야에 연구비의 70% 이상을 집행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이와 더불어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 출연연구기관들이 소규모 연구과제 비중은 줄이고 5년 이상의 중장기 대형 과제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정부는 이를 포함해 모든 정부 연구개발사업을 제로베이스에서부터 재검토하기로 했다. 각 부처가 투자 우선순위에 따라 각자 10%씩 구조조정하는 방안도 진행하겠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민병권·권용민기자 newsroo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