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5월17일 미국 뉴저지주 엘리자베스항 크레슨트 조선소. 특이한 모양의 배 한 척이 도크를 빠져 나와 물에 떴다. 굴뚝도 선실도 없이 검은색 선체만 보이던 이 배는 잠수정이었다. 이름은 홀랜드Ⅵ호. 아일랜드 태생의 교사 겸 엔지니어 존 홀랜드(John Holland·당시 57세)가 제작한 홀랜드Ⅵ호에는 보이지 않는 비밀 장치가 많았다.
무엇보다 항해 방식이 남달랐다. 잠수해서 작전할 때면 홀랜드Ⅵ호는 배터리로 움직였다. 수상에서는 내연기관을 돌려 항해하면서 배터리를 자동 충전했다. 크기가 16.4m로 작고 무게도 74t(수중 배수량 기준, 수상 항해시에는 64t) 남짓했던 홀랜드Ⅵ호는 동력원이 가솔린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구조가 현대의 디젤 잠수함과 같았다. 무장으로 어뢰도 장착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잠수와 부상을 위해 바닷물과 공기를 채울 수 있는 밸러스트 탱크도 갖췄다. 운항 방식과 구조 설계에서 홀랜드Ⅵ호는 현대식 잠수함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실용적 잠수함으로도 손꼽힌다. 서구에서 잠수 선박은 오랜 소망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언급했고 레오나드로 다빈치도 설계도를 그렸다. 16세기 중반에는 노를 저어 움직이는 잠수노선이 등장했고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에서도 원시적 형태의 잠수정이 전과를 올렸다.
잠수함은 소설에도 나왔다. 기선의 아버지인 로버트 풀턴이 나폴레옹에게 연구자금을 받아 제작한 잠수정 ‘노틸러스’호는 채택되지도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1869년)로 다시 살아났다.(미 해군이 1951년 8월 건조한 세계최초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함명도 노틸러스다) 쥘 베른보다 13살 아래였던 존 홀랜드는 청년 시절 해저 2만리를 읽으며 잠수함 제작의 꿈을 키웠다.
존 홀랜드가 건조한 홀랜드Ⅵ호를 3년 동안 시범 운행해본 미 해군은 1900년 15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홀랜드Ⅵ호는 독립전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잠수정으로는 세 번째. 그러나 정식으로 함정 목록에 오른 잠수정은 홀랜드Ⅵ호가 처음이다. 처음으로 실전배치됐기에 잠수함 식별번호 1번(USS-1)도 붙었다. 홀랜드의 성능에 만족한 미국은 6척의 개량형을 더 주문해 세계 최초로 잠수정단을 편성했다.
홀랜드급의 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잠수함을 ‘신사답지 못한 비겁한 무기’라고 조롱하던 영국도 홀랜드Ⅵ형을 확대 개량한 홀랜드Ⅶ형을 사들였다. 일본 역시 약 5년을 저울질한 끝에 홀랜드Ⅶ형 5척을 조립생산하고 발전형 2척을 일본 기술로 생산하는 계약을 맺었다. 당시 일본 해군 장교들의 치밀한 사전조사에 감동한 홀랜드는 잠수함의 설계도면은 물론 설비와 치공구 등의 설계도 일체를 넘겨줬다고 전해진다. 네덜란드와 러사아도 홀랜드Ⅶ형을 1척씩 도입해 발전시켰다. 당시에는 글로벌 잠수함격이었던 홀랜드급은 미국과 영국, 일본, 소련 잠수함의 모태였던 셈이다.
미국이 USS-1 홀랜드를 ‘선박으로 재활용하지 않고 반드시 부순다’는 조건 아래 단돈 100달러에 고철로 매각한 1913년 무렵, 각국은 엔진을 디젤로 바꾸고 함체를 키워 대양형 잠수함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1·2차 대전에서 잠수함을 활용한 통상파괴작전이 전세를 뒤집을 만큼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일이 애초부터 잠수함대 사령관이 원하던 300척의 U-보트로 전쟁을 시작했다면 연합국의 승리는 훨씬 어려웠을지도 모른다.(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독일의 잠수함은 65척이었다)
잠수함은 오늘날 더욱 유용한 무기체계다. 조용히 접근해 어뢰 한 방으로 거대한 함정을 격파하는 잠수함에 대항할 수단이 많지 않다. 한국은 잠수함을 가장 효율적인 전략무기로 인식하고 세력을 확충해 왔으나 주변국에 비해서는 미약한 수준이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 확보도 논의만 무성할 뿐 앞이 보이지 않는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