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말 주사우디대사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30년 넘게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근무하다 예상치 않게 대사로 임명돼 주변 선후배와 친지들께 부임 인사를 드렸더니 “왜 하필 사우디냐, 왜 하필 이 시기에?” 라고들 말씀하셨다. 아마 사우디 하면 ‘열사의 나라’라는 표현이 떠오를 만큼 덥고 폐쇄적이며 금하는 음식도 많아 살기 불편하고 또 저유가 때문에 사우디에 수출은 물론 건설 수주도 어려워져서 고생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거라는 동정에서 나온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때 난 “사우디가 어때서요, 지금이 어때서요?” 라고 반문하면서 부임 길에 올랐다.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분명히 길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부임 후 현지 주요 인사들을 두루 만나면서 사우디인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해 좋은 데 놀랐다. 내가 만난 대다수 사우디인들은 과거 건설붐 당시 우리 근로자들의 성실하고 근면한 자세, 우리 기업들이 공사기간을 앞당기면서도 품질 좋은 건물과 도로 등을 건설한 것을 얘기한다. 30년도 전에 우리 기업들이 지은 건물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특히 우리 기업이 지은 우주선 모양의 내무부 청사는 수도 리야드의 랜드마크다. 게다가 20~30년 전에는 건설근로자로 왔던 한국인이 이제는 첨단기술의 대명사인 자동차와 휴대폰 등을 들고 와 사우디인들을 매료시키면서 우리의 뛰어난 산업화 경험을 배우자는 인식이 사우디 정책지도자들과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사우디가 지금 저유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우디는 전체 수출의 약 90%, 재정수입의 80%를 원유판매 수입에 의존하는데 저유가로 지난해 980억달러의 재정적자와 535억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올해 초부터는 재정적자를 줄이려 수도·전기 등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고 불요불급한 정부지출을 억제하고 있다. 보조금 삭감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과 가처분소득 감소에다 정부의 긴축으로 내수시장이 대폭 위축되고 있다. 이곳에 진출한 우리 기업인들에 따르면 어떤 업종은 지난해보다 30~40%까지 내수가 줄 것이라고 한다. 과거 정부재정에 의한 단순시공(EPC) 방식이 주종을 이뤘던 건설 플랜트 발주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 재정이 부족하다 보니 직접 투자까지 해서 리스크를 지면서 건설하는 방식, 정부와 민간이 책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PPP), 프로젝트 입찰에 참가할 때 파이낸싱과 컨설팅 등 종합솔루션을 제시하면서 경쟁하는 방식, 사우디인 고용과 현지 원자재 조달비율을 높이도록 요구하는 등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의 기회가 있다고 본다. 과거 수주환경이 좋았던 시절에는 중국·인도 등 저임으로 무장된 외국기업들 때문에 우리 기업들이 큰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여건이 나빠지다 보니 정말로 경쟁력 있는 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한국 근로자와 기업들에 대한 좋은 평판, 우리의 발전된 기술과 산업화 경험을 배우고자 하는 현지 정부, 튼튼한 제조업이 있어 현지 국산화율 요건을 맞추기 위해 필요하다면 국내 제조업체와 동반 진출할 수 있는 등 우리는 다른 나라 기업들이 갖지 못한 장점들을 갖고 있다. 게다가 4월25일 사우디정부가 발표한 ‘사우디 비전 2030’도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세계 최대 석유회사인 아람코사의 주식을 일부 매각해 재원을 조달하고 이를 국부펀드를 통해 투자하며 방산·광업·관광·소매업 등 새로운 성장분야를 적극 육성한다는 야심 찬 계획인데 여러 분야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 기업들의 참여 기회가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우리의 대응자세다. 이제 단순히 제품만을 수출하던 방식을 넘어서 사우디 자본과 우리의 기술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진출방식을 고도화해야 한다. 건설도 단순시공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PPP나 파이낸싱을 포함한 종합솔루션으로 수주경쟁에서 이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기업들이 출혈경쟁하지 말고 발주방식 변화에 맞춰 서로의 강점을 조합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런 노력들을 추진할 경우 더 이상 “왜 하필 사우디냐, 왜 하필 이 시기에?”가 아닌 “사우디가 어때서요, 또 지금이 어때서요?”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권평오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