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국가 R&D마저 포퓰리즘 덫에 갇히나

정상범 논설위원

오락가락 지원기준에 업계 혼란

일자리 등 정책 보조수단 전락

좀비기업 살리는 '나눠먹기'도

선택과 집중으로 신산업 키워야





3년째 국책 연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정보통신업체 이모 사장은 지난달 평가기관 담당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신소재 개발과 관련된 연구인력 비중을 40%로 높여 계획서를 다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연구원 3명으로 꾸준히 진행해오던 사업이라 느닷없는 통보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기관에서는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방침에 맞춰 전체 연구비에서 인건비 비중을 무조건 높여야만 지원이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게다가 내년에는 인건비 비중이 51%까지 상향 조정될 예정이니 철저히 대비하라는 얘기까지 들어야 했다. 그는 연구원 한 명조차 구하기 어려운 터에 새로 채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애써 진행해왔던 국책사업을 포기할 수도 없어 진퇴양난이라고 하소연했다.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에 산업 혁신을 주도해야 할 국가 연구·개발(R&D)사업이 흔들리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기업들은 수시로 바뀌는 정책에 따라 사업 계획을 다시 짜느라 골머리를 싸매는가 하면 평가일정이 늦춰지면서 개발사업 자체가 표류하는 사태마저 빚어지고 있다. 정부가 올해부터 일자리 창출을 최대 국정목표로 삼으면서 모든 연구사업비의 일정 비율을 연구인력 확대에 투입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탓이다. 이러다가는 국가 R&D사업이 생산성이 떨어지는 취로·복지사업에 머물고 말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업계에서는 지금도 공동 연구라는 미명 아래 연구비의 17% 정도를 국책연구소나 대학에 상납(?)하는 터에 인건비 비중이 높아질 경우 연구의 질을 떨어뜨리고 외부 기관들의 배만 불려주는 구조가 고착화할까 우려하고 있다. 한마디로 재주는 곰(중소기업)이 부리고 돈은 연구소나 대학이 챙겨가는 꼴이라는 얘기다.

관련기사



정부가 좀비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하겠다며 중소·중견기업의 정부과제 참여를 획일적으로 제한하는 것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선택과 집중전략으로 글로벌 강소기업을 키우겠다는 우수기술연구센터(ATC)사업이나 월드클래스 300(WC-300)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기업들은 참여 과제 수를 업체당 무조건 세 개로 엄격하게 제한하다 보니 원활한 수출 사업화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애초에는 성장 잠재력과 R&D 수행능력이 높은 기업에 기술개발자금을 몰아준다는 취지였지만 나눠 먹기 사업으로 전락하다 보니 이런 폐단이 빚어진 것이다.

미래 한국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국가 R&D가 백년대계를 준비하기는커녕 시류에 휩쓸려 오락가락하는 행태는 적잖은 후유증을 낳게 마련이다. R&D만큼은 철저한 정글의 법칙을 적용해 글로벌 기업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춰야 마땅한 일이다. 혁신능력이 뛰어난 기업이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기업은 세금을 내고 일자리를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처럼 R&D 정책이 손쉬운 일자리를 만들고 좀비 기업을 연명시키는 보조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신성장산업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간 국가주도 R&D가 여러 성공사례를 낳았지만 지나치게 정부가 개입하는 바람에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관료들 속성상 실패가 눈에 보이는데도 무리하게 강행하는 사례도 수없이 봐왔다. 당장 인공지능(AI)만 해도 R&D 투자순위를 바꿀 만큼 중요한지, 막대한 재정을 소화할 연구기반은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 살피는 게 급선무다. 대통령이 AI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력 양성 등 기초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한 방향으로만 몰려가는 게 우리의 실상이다. 정부와 산업계는 턱밑까지 쫓아온 중국에 맞설 유일한 대책은 원천기술 개발과 혁신적인 공정기술밖에 없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어느새 포퓰리즘 정책이 유행병처럼 국가 R&D 분야까지 스며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조업 강국 한국호가 내부 요인에 의해 서서히 침몰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되돌아볼 때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co.kr

정상범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