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대게, 그렇게 어른이 된다

[식담객 신씨의 밥상] 아홉번째 이야기-대게



“미안한데, 마트 가서 고등어 한 마리랑 똘이 우유 좀 사다 줄래요?”

2007년 어느 늦은 봄, 서른세 살의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몸살 기운이 있던 아내가 장을 봐 달라며 돈을 건넸습니다.

꼬깃해진 5,000원권의 율곡 선생처럼, 그 무렵 우리 가족의 삶도 고단했습니다.

맨주먹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살림살이가 항상 빠듯했습니다.

월급에서 대출금에 집세를 덜고 나면, 아이 옷 한 벌 사는 데도 여러 차례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마침 담배도 떨어졌길래, 잘됐다 싶었습니다.

운동복 차림으로 마트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3년 전만 해도 꽤 세련된 옷이었는데, 어느새 색이 바래고 무릎이 나와 후줄근해져 있었습니다.

마트 인근에 이르자, 놀러 나온 가족들이 눈에 띕니다.

인근 놀이공원에서 나오는 부부와 아이들의 활짝 핀 표정을 보니, 앓고 있는 아내와 TV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세 살 아이가 눈에 밟힙니다.

서둘러 마트에 들어갑니다.

고등어를 사러 들른 생선 코너에서 대게가 진열돼 있습니다.

원래 4~5만원은 되는 가격이 1만 원 조금 넘습니다.

다리가 한두 개씩 없는 녀석들이라, 특별히 싸게 판답니다.

지갑을 열어 봅니다.

장보고 남는 돈과 지갑에 있는 용돈을 더해도 1,000원 가까이 모자랍니다.

아쉽게 발걸음을 돌립니다.

우유를 사고 계산대에서 담배를 달라고 하는데, 아내 모습이 다시 떠오릅니다.

“잠시만요. 담배는 됐구요, 죄송하지만 잠시만 다녀올게요.”

황급히 달립니다.

아내와 아이가 맛있게 게를 먹을 모습만 떠오릅니다.

하지만 생선코너 진열대엔 이벤트 대게가 없습니다.

시뻘게진 얼굴로 가쁜 숨을 고르며, 점원 아저씨께 말을 건넵니다.

“저, 죄송한데요. 아까 그 대게는 이제 없습니까?”

“아, 타임세일 방금 끝났습니다. 아쉽게 됐네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친절하게 대답해 줍니다.

“예... 그렇군요...”

“아까 사시지 그랬어요?”

“돈이 1,000원 정도 모자라서요. 아내가 아파서 대신 장보러 왔는데, 돈을 딱 맞춰서 왔네요.”

시무룩하게 돌아서는데 후회가 밀려옵니다.

게를 먼저 살걸...

“잠시만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아저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이거 퇴근하고 소주 안주 하려고 제가 따로 둔 건데, 아저씨 가져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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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가족들이랑 드실 걸 왜 저한테...?”

아저씨가 빙긋 웃으며 대답합니다.

“괜찮아요, 저 아직 총각입니다.”

“저...돈도 모자란데...”

“알아요, 맞춰서 찍어드릴게요.”

예상치 않은 후의에 당황스럽습니다.

어려서부터 난 셈에 깐깐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내게 준 만큼만 보답하거나 값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난생 처음 보는 내게 이분은 넘치는 친절을 베풉니다.

비싼 제품을 산 고객도 아니고, 단골이 될 가능성도 없는 사람인데...

돌이켜 보니,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배려로 큰 탈 없이 어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내게 무엇을 바라고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신부 시절의 아내와 꼬맹이 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보는 행인과 타인도 아무 조건 없이 내 가족을 배려해 주었습니다.

뒤늦게나마 그걸 깨달을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쟁반만한 대게를 꺼내놓습니다.

“와아~!”

아이가 연신 감탄하며 대게를 바라봅니다.

처음 보는 큰 게의 모습에 겁 먹은 듯, 엄마 뒤에 숨어 젓가락으로 찔러봅니다.

아내는 냄비에 소금을 깔고 대게를 구웠습니다.

붉으스름하게 익은 게껍질 색깔을 보며, 몸살기운에 붉으스름한 아내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아이가 허겁지겁 게를 먹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자식 목에 음식 넘어가는 소리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똘이, 게 맛있어요?”

“네!”

아이는 우렁찬 대답소리와 함께 자기 접시를 냄비 앞에 놓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음식을 더 달라는 모습이 귀엽고 신기합니다.

“그나저나 돈 안 모자랐어요? 비쌌을 텐데.”

“선물로 주셨어, 멋쟁이 총각 형님이.”

“응, 그걸 왜 그냥 줘?”

“그런 게 있어.”

10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되는 기억입니다.

우리는 대개 그렇게 어른이 되나 봅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칼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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