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이신우칼럼]부패의 시장가격과 헌법재판소

국회 꼼수에 흐려진 김영란법 본질

권익위는 촌지 액수 多寡에만 관심

헌재 과연 제대로 결단내릴지 의문

논설실장논설실장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빈녀양모(貧女養母)’ 이야기가 나온다.


경주에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는 처녀가 있었다. 집이 가난해 문전걸식을 하며 어머니를 모셨으나 흉년이 들자 그것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남의 집에 몸을 잡히고 곡식 30석을 얻는 대신 집안 허드렛일을 맡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가 “이전에는 겨죽을 먹어도 마음이 편하더니 요즘은 쌀밥을 먹는데도 마음이 불편하다”며 까닭을 묻는다. 딸이 사실을 밝히자 모녀는 서러움에 북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효종화랑의 동료들이 이를 목격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자 너도나도 모녀를 돕기위해 발벗고 나섰다. 효종화랑이 곡식 100석을 보내고 부하들도 십시일반으로 벼 1,000석을 거뒀다. 진성여왕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주고 군사들로 집을 호위하도록 했다.

아름다운 일화다. 하지만 어느 한구석 찜찜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다. 구걸 행위는 당연시하는 반면 대출받아 생활비로 쓰면서 떳떳하게 갚아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있다. 화랑이나 조정에서조차 모녀의 눈물에만 동정을 표시할 뿐 정작 노동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다.

최근 국민권익위원회가 입법예고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령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마치 빈녀양모와 흡사하게 전개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덮어둔 채 드러난 현상만을 놓고 백가쟁명이 벌어지는 꼴이다.

먼저 꼬일 대로 꼬여버린 김영란법의 내부를 들여다보자. 이 법은 원래 공직자 부패방지법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직자라는 말이 쏙 빠지고 ‘부정청탁 및…’으로 바뀌어버렸다. 지금이라도 이것이 공직자 관련인지 아니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판이다.


굳이 공직자도 아닌 사립학교 교사나 언론인을 법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숨은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들의 부패 문제는 이미 형법이 관할하고 있으니 이중처벌이 되고 만다. 애초의 취지대로 공직자만이라면 당연히 국회의원이 포함돼야 한다. 그런데 국회의원은 교묘히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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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저도 아니라면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집단이 대상인가. 그럼 한국방송공사(KBS)나 국고 보조를 받는 연합뉴스 그리고 교육예산으로 봉급을 받는 사립학교 교사가 적용대상이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시민단체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 시민단체가 정부보조금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럴 경우에도 민간 언론사는 적용 대상이 될 수가 없다. 특별법을 적용하려면 일단 일반 언론사를 정부 보조금으로 키워줘야 할 테니까. 그래서 나온 변명이 언론의 공공성이 문제란다. 오호라, 그럼 공공성은 누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요즘 인기 연예인들은 대중의 의식과 행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이 먹고 쓰는 음식물이나 물건은 곧바로 인기 상품이 된다. 패션조차 따라 하기 일쑤다. 그것이 공공성이라면 인기연예인들도 당연히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권익위는 입법 예고시 이런 혼란부터 제거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고작 한 일이라고는 ‘부패의 시장가격’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 것뿐이다. 금품을 받을 경우 한 번에 100만원, 1년 300만원을 초과할 경우 형사처벌 한다든가 아니면 식사대접 상한액은 3만원이고 선물 상한액은 5만원, 그리고 언론인은 좀 봐줘서 10만원까지.

언론 쪽도 군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부패 개혁에 정면으로 반발하면 여론으로부터 욕을 얻어먹게 생겼으니 억지로 아이디어를 짜낸 게 소비위축 우려다. 그러면서 농수축산업이 다 망하고 식당이 줄줄이 문을 닫게 됐다고 아우성이다. 내수 활성화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부패를 눈감아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런 혼란을 일도양단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적용 대상을 애초의 의도대로 공직자로 좁히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김영란법의 취지를 일대 전환하는 것이다. 당연히 국회의원이든 시민단체든 언론이든 누구나 똑같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함을 천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개정제(國民皆正制)’라도 선언하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그 책임을 맡게 됐다지만 과연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 듯한 지금의 김영란법 논란을 한꺼번에 잠재울 수 있을까. 필자는 회의적이다. 행정부든 사법부든 우리 사회에서 조폭 국회에 맞설 수 있는 집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shinwoo@sedaily.com

이신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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