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VIP(small VIP)께서 오늘 9층에서 근무할 예정입니다. 9층에 계신 임직원 여러분은 업무 태도에 각별히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국내 굴지의 카드사에 근무 중인 오현웅(38·가명) 과장은 사내 메신저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오 과장은 “얼마 전 고위 임원의 자제가 인턴으로 채용됐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황당한 메시지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 실업의 늪이 깊어지는 가운데 ‘금수저’ 부모 덕택에 좋은 직장을 쉽게 잡는 취업 불평등이 만연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회계법인과 자산운용사의 경우 ‘절대 갑’인 고객들을 계속 붙잡기 위해 자녀의 취업을 은밀히 권유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서울경제 취재 결과 확인됐다. 금융·회계 분야 뿐만 아니라 일반 대기업에서도 고위 임원이나 고위공직자 자녀가 입사할 때 특혜를 주는 관행이 만연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입사원 공채에 비해 ‘지켜 보는 눈’이 적은 경력 사원과 인턴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그들만의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행태는 채용 시즌마다 100여개의 입사지원서를 쓰고 평균 2년 이상 구직 활동을 통해 취업에 성공한 신입 사원은 물론 여전히 취업난에 허덕이고 있는 구직자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넘어 분노를 안겨주고 있다.
채용특혜의 목적은 대부분 금융사 고객관리 차원
고액자산가 잡아두려 인턴이나 정규직 먼저 제안도
국내 대형 항공사에 근무 중인 최영민(30·가명) 씨는 대학생 때 지원도 하지 않은 C증권사 인턴 합격 통보를 받았다. 최씨는 “직접 인턴을 하겠다고 쓴 적이 없는데 합격이라는 통지가 와서 놀랐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꽂아 준 거였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동기가 10여명 되는데 대부분이 부모님의 빽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경우였고 경험은 될 것 같아 나도 인턴 과정은 거쳤다”고 고백했다.
C증권사가 고객관리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고액 자산가의 아들인 최씨를 인턴으로 낙점한 것이다. 최씨는 “증권사는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욕심이 없었지만 같이 인턴 했던 친구들 중 5명 정도는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다”며 “요새는 인턴을 거쳐야만 정규직으로 뽑는 회사도 많아서 부모님 덕에 혜택을 받은 건 맞다”고 털어놨다.
M금융투자사에서 법인 영업을 하고 있는 신현민(35·가명) 씨도 낙하산 인사를 종종 목격했다. 신씨는 “거래 담당자나 자금쪽 상무, 전무 같은 임원들이 ‘우리 애가 대학 졸업하는데 취업을 하긴 해야지’라고 운을 띄우면 없던 채용 계획도 갑자기 생기는 경우가 꽤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진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들어오는 애가 있다. 더 웃긴 건 다 알지만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거나 아는 척 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경영 승계가 확실한 경우에도 부모가 운영중인 회사에서 첫 사회 경험을 시작하기보다는 금융권 경력을 더 선호한다고 입을 모은다. 가업에 처음부터 발을 담그기 보다는 금융·회계·컨설팅 등 어느 산업과도 접점이 많은 분야에서 근무한 경력이 차후 경영 승계를 하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기업 계열사 별로 계층 존재…상위서 하위기업에 채용 종용
추천 절대적인 경력직, 신입사원보다 특혜 받는 경우 2~3배 많아
일반 대기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기업의 경우 계열사별로 보이지 않는 계층이 존재해 상위계층에 속한 기업 임원이 하위계층 기업에 자녀의 채용을 종용하는 형태가 많다. H그룹 계열사에 재직중인 이연희(32·가명·여)씨는 “모회사 전무 딸이 자금팀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다”며 “그룹사 내 기업들이 계열사마다 급이 나눠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웬만한 대한민국의 대기업에선 힘있는 모회사에서 낮은 급인 계열사나 자회사 취업을 청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계열사에 들어오는 게 쉽고 티도 안 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문에 민감한 부모는 ‘품앗이 채용’을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부모가 다니는 회사가 아니라 지인이 고위 임원으로 있는 회사에 자녀를 취업시키고 반대로 지인의 자녀를 뽑아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사 임원 자녀가 직접 들어오는 것보다는 거래처나 관계기업의 자녀를 찔러주는 게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경력채용의 경우 공고 없이 내부직원 추천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혜를 입는 인원이 신입 채용의 2~3배는 된다. 헤드헌터 경력이 있는 건설사의 인사팀 홍진용(38·가명) 과장은 “얼마 전 G대기업이 경력직을 뽑았는데 부사장이 추천한 사람이 됐다”며 “구색 맞추기 용으로 2~3명 정도 추천을 더 받기는 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라고 귀띔했다.
근무 경력을 부풀렸다는 사실을 알면서 눈감아 주는 행태도 포착됐다. 홍 과장은 “몇 년 전에 완전한 허위 경력은 아니지만 사실상 보조만 했던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처럼 부풀린 게 들통났는데도 채용이 강행된 경우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고위공직자 아들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부모 후광에 취업문 ‘프리패스’하고도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
태도 불량은 편견…개인 차 따른 것일 뿐이라는 반박 의견도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힘들다는 취업 시장을 부모의 후광 덕에 단번에 뚫었지만 불성실한 업무 태도로 사내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대기업인 S사의 마케팅 부서에 근무중인 이명진(41·가명) 차장은 “홍보실에 업무 시간 내내 조는 걸로 유명한 직원이 있었다”며 “한 언론사 간부의 딸이었는데 홍보실 T/O가 너무 아까워서 다른 팀으로 보냈지만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이씨는 “어느 날 그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애를 왜 못살게 구느냐고 애가 집에 오면 녹초다. 일 그만 시키라고 윽박질렀다고 들었다”며 혀를 찼다. 최근 아버지가 임원직을 그만두면서 퇴사했다는 후문이다.
대기업인 K사 기획팀에 근무중인 김진영(32·가명·여) 대리는 ‘회사는 결혼 전까지만 다닌다’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대기업의 1차 협력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 입김으로 입사한 김 대리는 신입사원 연수 때 벤츠를 끌고 등장하면서 유명인이 됐다. 김씨와 함께 근무중인 동료 직원은 “다행히 일을 못한다는 느낌은 없지만 6시 땡 하면 바람같이 사라진다”며 “승진 욕심 부릴 필요도 없는 사람인데 야근 할 이유가 없긴 하지 않냐”고 한숨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일반 지원자보다 취업 스펙이 부족한 경우는 드물다는 게 인사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도피유학을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과 관리를 받기 때문이다. 오히려 혜택을 받고 입사한 사람들은 설렁설렁 일한다는 편견을 깨려고 더 성실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C증권사 입사 특혜자 김지훈(30·가명)씨는 ‘얼마나 잘하겠어’라는 색안경을 벗기기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김씨는 “쉽게 들어왔다고 쉽게 일한다는 생각이야말로 편견”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취업 불평등이 채용과정에서의 절차적 공정성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민지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계층 공고화 현상은 부모가 자녀에게 20년 이상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의 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며 “사회적 기회구조의 문제로 보는 게 더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고위층 자녀에게 채용 특혜를 주는 행태는 잘못된 것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그러나 어느 대학을 가느냐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에 따라 대물림되는 사회적 계층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덧붙였다. 절차적 평등 역시 보장되어야 하지만 기회의 평등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면 실효성이 없다는 분석이다.
/김나영·정수현기자 iluvny2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