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미쓰비시 강제 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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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한테도 그런 음식은 안 줍니다. 기름 짜내고 난 썩어서 냄새나는 깻묵을 바닷물에 삶아 먹으라고 줬습니다. 죽지 않게 먹이고 그래도 죽으면 내다 버리고 죽지 않으면 또 일을 시켰습니다.” 지난해 8월14일 대전에서 열린 광복 70돌 행사에서 김한수(98) 할아버지는 미쓰비시 강제징용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김 할아버지는 1944년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서 일본 나가사키 미쓰비시조선소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항공모함 제작에 동원돼 중노동을 하며 인간 이하의 노예생활을 강요받았다.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양금덕(85) 할머니는 1944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끌려가 군용기에 페인트칠을 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페인트는 물론이요 점성을 낮추기 위해 쓰는 시너의 독성까지 더해져 피부·눈·호흡기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때 일 때문에 양 할머니는 지금 밥이 타도 모를 정도로 냄새를 맡지 못한다. 역시 임금은 받지 못한 강제 노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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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미쓰비시머티리얼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의 전쟁 포로를 강제징용한 데 대해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앞서 미국인 피해자에게 사과했다가 중국 등 다른 국가의 피해자들이 왜 미국인 피해자에게만 사과하느냐고 항의하자 추가 사과에 나선 것이다. 지난 1일 미쓰비시는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인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1인당 10만위안(1,800만원)의 합의금을 지불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교환했다. 합의금 지급 대상은 3,765명이다.

미쓰비시는 아직 한국인 피해자에게는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추가 사과할 때도 한국인 피해자는 대상이 아니었다.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 이유다. 강제징용 당시 조선인은 일본의 강제 합병으로 법적으로 일본 국민이었으며 일본 국민에게는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강제징용이 아니라는 논리다. 한국인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종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해석도 곁들여졌다. 미쓰비시는 한국 법원에서 한국인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사과하거나 배상할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런 미쓰비시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기석 논설위원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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