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애니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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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한국 이민사 중 가장 슬픈 삶을 영위한 이민자는 쿠바의 ‘애니깽’이다.” 쿠바 한인 후예를 돕는 일을 하는 밴쿠버 한인회 이덕일씨의 평가다.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 이민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선인장의 일종인 애니깽(에네켄)이다. 선박용 로프 재료였던 애니깽 농장으로 팔려가면서 시작된 슬픈 이민사가 그대로 이 지역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상징이 됐다는 설명이다.


1905년 사탕수수 농사를 지으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일본 송출 회사의 말에 속아 배를 탔던 1,000여명의 조선인이 도착한 곳은 멕시코 유카탄에 있는 애니깽 농장. 애니깽은 가시가 많고 독소도 있어 수확이 힘든데다 이들은 잦은 매질과 감시와 총살 등이 다반사인 노예나 다름없는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일방적으로 연장된 계약 기간이 끝난 1921년 이들 중 300여명이 살길을 찾아 나선 끝에 도착한 곳이 쿠바의 마나티 항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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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했던 ‘백색 황금’을 찾아 사탕수수 농장서 일자리를 구했지만 이마저도 세계 설탕값이 폭락하면서 이내 자리를 잃고 만다. 결국 그들은 멕시코에서 배운 애니깽 농사와 농장 노동을 다시 하게 된다. 그 와중에 1940년 노동 국유화로 외국인인 한인들은 쿠바사회에서 더 주변으로 밀려났으며 뒤이어 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져 간다. 1996년 이 같은 줄거리의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영화 내용보다 당시 문제가 된 대종상 수상 논란만이 더욱 부각돼 있다.

우리 외교 수장으로서 쿠바를 처음 방문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최근 한인 후예들을 만나 양국 관계의 ‘가교역’을 당부했다. 윤 장관의 이번 방문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일한 비수교국인 쿠바와의 수교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이다. ‘북한 형제국’인 쿠바와 수교가 되면 우리 외교로서는 큰 성과이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얼마 남지 않은 쿠바 애니깽들에게도 좀 더 관심이 쏟아지기를 바란다. /온종훈 논설위원

온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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