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면보다 제비

[식담객 신씨의 밥상] 열한번째 이야기-수제비



내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춘천입니다. 그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며, 키와 꿈이 자랐습니다.

춘천의 겨울은 1980년대 초등학생들에겐 혹독했습니다.


특히, 전교생 조회가 있던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은 아주 지긋지긋했습니다. 면도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산 중턱 운동장에, 일곱 살부터 열세 살짜리 아이들이 학도병처럼 도열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확성기를 타고 오래오래 주옥같이 교정에 울려 퍼졌습니다.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 귀와 발이 시려 왔습니다. 하지만 귀를 감싸거나 비빌 수 없었습니다.

참을성이 없는 ‘나약한 어린이’라는 선생님의 손가락질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저 감각이 무뎌지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교장 수령님의 위대한 말씀이 끝나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운동장 조회가 없는 겨울방학은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안도의 기간이었습니다.

겨울방학 점심엔 주로 라면과 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정부와 학교에서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대였습니다.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으면, 미국사람들처럼 키도 크고 힘도 세진다는 믿음이 상식인 듯 만연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많이 먹는 건 빵이나 면이 아닌 고기였는데.^^;;

어머니는 주로 안성탕면 두 개에 국수 한 줌과 김치를 넣고 끓여주셨습니다.

그게 성인 여성 한 명과 고학년 초등학생 두 명의 한 끼였습니다.

밍밍한 국수가 싫어 라면만 끓여 먹자고 어머니께 졸랐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라면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전 알고 있었습니다.

한 개에 110원짜리 안성탕면을 식구 수대로 먹는 게 부담스러울 만큼, 우리 집 가계 사정은 착잡했습니다.

그땐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형편이 창피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 사는 집 아이들보다 더 멋진 어른이 될 거란 막연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특별한 점심을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멸치를 우려낸 물에 새콤한 김치를 넣고, 주홍색 석유 곤로에 불을 붙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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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이 아쉬운 석유 곤로 위에서 한참 만에 냄비물이 끓어오르면, 밀가루 반죽을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뜯어 던지셨습니다.

잘 익은 쫀득한 반죽은, 흐물대는 국수보다 한결 더 맛있었습니다.

“엄마, 나 맨날 수제비만 해주세요. 국수 좀 그만 먹고.”

터질 듯 양볼 가득히 수제비를 채운 채, 어머니께 희망 사항을 얘기했습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빙긋 웃으며 나지막히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잘 먹이면 쑥쑥 클 텐데...”

흐뭇한 그 표정에 배어 있는 착잡한 그늘을, 열한 살 어린 막내도 읽곤 했습니다.



회사 인근에 맛있는 김치 수제비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오늘은 아구찜’이란 해산물 전문 식당입니다.

수제비를 따로 팔지는 않습니다.

건대구찜을 주문하면, 대구에서 발라낸 껍질과 뼈로 육수를 내서 김치와 콩나물을 넣고 끓여 내옵니다.

깊고 담백한 맛이 참 푸근합니다.

평양냉면같이 개운한 이북 음식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아쉽게도 건대구가 나오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습니다.

따끈한 국물 한 술에 쫄깃한 수제비를 씹으면, 어린 시절 춘천의 겨울방학이 떠오릅니다.

어려웠던 시절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과 철없던 투정이 떠올라, 정겨움과 안쓰러움이 뒤섞이곤 합니다.

이제는 일흔에 접어드신 어머니.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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