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에 달한 조선·해운의 구조조정 논의가 진행되면서 가장 많이 나온 지적이 ‘해결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에 부실은행과 대기업에 가차 없이 칼날을 휘둘렀던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같은 인물이 선봉에 서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카리스마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고 해묵은 구조조정 시스템과 내 탓 네 탓을 외치는 면피 현상만 남았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최근 “과거에는 선배들이 횃불을 들어올리면 나머지가 따라오는 구조였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라며 구조조정의 고충을 토로했다. 금융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IMF에 빅딜이 가능했던 것은 증권 등 2금융이 전혀 발달하지 않아 은행을 통한 압박이 가능했기 때문”이라며 “은행 빚보다 시장성 차입이 더 많은 지금은 어느 장관이 나선다고 해도 구조조정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구조조정의 환경은 달라졌지만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틀과 인식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상처가 곪을 대로 곪은 뒤에야 금융당국이 땜질식 응급처방을 내리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폭탄 돌리기’는 기업부터 시작됐다. 일례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지난 2010년 금융감독원이 주채무계열에 현대상선을 선정하고 채권단이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요구하자 회사채를 발행해 채무를 갚아버리고 주채무계열에서 이탈했다. 구조조정 시기를 놓친 것이다. 2014년 현대그룹은 다시 주채무계열로 들어왔으나 이미 회사 부실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커져 있었다.
조선업종도 마찬가지다. 이미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경고음이 울렸지만 2012년 3조원의 자금을 조선업에 지원해 연명할 수 있도록 했다. 세계적인 해운 및 조선 관련 전망기관들이 2013년에는 2014년 하반기, 2014년에는 2015년 하반기에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자 당국자들은 ‘권위 있는’ 보고서를 내세워 면피했다. 정권의 최고 책임자부터 실무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이 정권에서만,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때만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보신주의가 팽배했다.
은행들도 조직의 장기적 손실을 걱정하기보다는 자기 책임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이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와대 등 정부가 대우조선해양 지원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한 것은 책임지지 않으려는 채권단의 단면을 보여준다.
‘폭탄 돌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부실기업 정리를 위한 법 체계도 방치됐다. 채권단 주도의 자율협약은 법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코에 걸면 코걸이’식 운영으로 문제가 많은 것으로 수년간 지적돼왔다. 명목적으로는 채권단 100%의 동의하에 진행된다지만 사실상 첫 동의서만 100%를 요구할 뿐 이후에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상의 워크아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준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시늉만 내다가 경기가 좋아지면 아무 문제 없던 게 되니까 은행은 충당금을 안 써도 되니 좋고, 기업은 살아나니 좋고, 감독당국은 책임을 안 져서 좋은 제도”라며 “언젠가 한번은 사고가 터지는 것인데 내 임기 동안 안 터지면 그만이라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법정관리가 낫다는 평가도 일각에서 나오지만 이 역시 반론이 적지 않다. 빚 탕감 과정에서 엄청난 손실을 본 노동자와 하도급 업체, 채권자 손실은 감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8일 발표된 구조조정 내용도 결과만 놓고 보면 STX조선해양 1개 기업만 정리됐을 뿐 국민세금을 투입해서라도 나머지 기업의 연명을 다시 한번 돕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시장과정부연구센터 소장은 “이헌재식 구조조정의 한계가 지금 나타난 것”이라며 “정부와 국책은행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은 금융관료만 좋은 일일 뿐 자본시장과 법원 주도 회생절차의 미발달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한다”고 평가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범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는 금융통화위원회처럼 기록을 남기되 시차를 두고 공개해야 한다”며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궁극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오로지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이연선·임세원기자 bluedas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