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춘권(春卷), 봄날의 주먹

[식담객 신씨의 밥상] 열두번째 이야기-춘권



“오늘 점심 미팅은 마케팅실 M 과장이랑 같이 다녀와.”

오래 전 어느 봄날, 모 일간지 신임 출입기자를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출입기자 처음 만나는 날인데, 다른 부서 담당자가 동행하면 어색하지 않을까요?”

“사정이 있으니 같이 다녀와.”

새로 미는 제품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마케터와 함께 가라십니다.

가슴이 팍팍합니다. 하필 M 과장이라니~

M 과장은 동료들에게 기피대상이었습니다. 권위적인 태도에 흑백논리, 성급한 일반화가 일상다반사라, 함께 일하기 피곤했습니다.

특히 회의에서 일장연설을 자주 늘어놨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은 자신의 경험과 능력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가 발언을 하면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며 생각했습니다.

‘대체 왜 저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지?’

하지만 40대 중반인 그의 말을 10년 아래인 내가 자를 수는 없었습니다.

나이 타령 분야에선 인간문화재급이었습니다.

항상 후배들에게 존경과 대접을 바랐지만, 돼지껍데기에 소주 한 잔 사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공짜 좋아하는 꼰대’였습니다.

꼰대의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 추정설이 있습니다.

주름을 의미하는 번데기와 권위의 상징인 곰방대를 섞었다는 얘기가 대표적입니다.

‘거들먹거리다(condescend)’라는 뜻의 영어에 유래했다는 설과 일제시대 민족반역자들이 받은 작위인 ‘백작(comte)’에서 왔다는 설도 재밌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의미는 ‘잘난 척 좋아하는 나이 많은 헛똑똑이’입니다.

그런 면에서 M 과장은 FM 꼰대였습니다. 그래서 외부인을 함께 만나는 것 자체가 불안합니다.

점심시간 시내의 어느 유명 중식당, 담당 기자와 서로 명함을 건네고 악수를 나눕니다.

홍보맨은 항상 쾌활한 인상을 줘야 합니다. 옆구리에 수류탄이 꼽혀 있다고 해도...

“A코스로 부탁합니다.”

“지금 주문이 밀려서 조금 늦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웨이트리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합니다.

기자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보통 회사의 역사와 주요사업, 비전, 제품에 대해 소개합니다.

이야기가 오가면서 인간적인 친분도 하나 둘 쌓입니다.

이를 통해 업무적으로 인간적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 서로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능력은 홍보인의 주요 경쟁력으로 꼽힙니다.

“마케팅팀 M 과장입니다. 생산부터 영업, 마케팅까지 다 해봤습니다. 신 대리는 아직 잘 모르는 게 많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셔도 됩니다.”

어라, 이게 무슨 상황이지?

본인을 과시하려는 건가요, 아니면 나를 무시하려는 걸까요?

어째 처음부터 조짐이 좋지 않습니다.

회사 역사와 주요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M 과장이 자꾸 끼어듭니다.

“그래서 이번 신제품은 컨셉은 마이너스입니다. 마케팅이란 게 돌고 돌아서 빼고 더하고가 반복돼요. 옛날에 매장관리할 때 생각나네요. 한밤중에 고객사에서 전화 온 걸 정성을 다해 응대해 줬더니, 나중에 저한테 은혜를 갚는데...”

“그 때 제가 아이디어를 내서 신사업에 뛰어든 겁니다. 사장님이 저를 어찌나 칭찬하시던지...”


“사실 제가 다른 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 제안을 받았었어요. 그런데 후배들이 눈에 밟혀서 차마 못 옮기겠더라구요. 요즘 친구들은 너무 계산적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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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 편 기자의 웃는 눈 언저리에 불편한 그늘이 드리워져 보입니다.

시간을 도둑 맞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평소보다 시간이 늦은 데다가 말도 많이 해, 허기가 더 강렬합니다.

드디어 음식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주문한 지 20분 만입니다.

첫 번째 나온 음식은 춘권입니다.

양상추가 깔린 접시에, 춘권 여섯 개가 두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노릇하게 익은 춘권 냄새에 코가 미혹되고, 침샘에서 온천이 터집니다.

먼저 주빈이 본인 접시로 음식을 옮겨 담습니다.

앗, 여섯 개 중 세 개를 가져갑니다. 뭔가 헷갈린 듯합니다.

이미 담았는데, 뭐 어쩔 수 없죠...

이어 연장자인 M 과장도 음식을 담습니다.

내심 궁금합니다.

본인 입만 아는 이 양반이 남은 춘권 세 개 중에 두 개를 담을지, 아니면 이직 제안을 뿌리칠 만큼 아낀다는 후배를 위해 한 개만 담을지...

두근두근두근... 두구두구두구...

정답은 세 개였습니다. 접시엔 양상추만 남았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남은 푸성귀를 담아 아삭아삭 씹었습니다.

“신 대리 야채 좋아하네. 요즘엔 젊은 친구들이 건강 더 챙긴다니까. 사실 튀긴 밀가루랑 고기가 건강엔 별로지. 내가 후배 위해 희생한 거야. 나중에 막걸리 한 잔 사라.”

순간 울컥한 마음이 들고, 주먹에 힘이 실립니다.

‘아! 때려주고 싶다.’



‘동네방네 소문 내고, 합의금 요구할 거야. 참자.’

머릿속에 그려진 위기상황이 타개되자, 신기하게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이후 오고 간 이야기는 양념 안 한 닭가슴살처럼 퍽퍽합니다.

그냥 음식이 오면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물론 M 과장이 덜고 남은 자투리 음식입니다.

그가 일장연설에 들어가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는 시늉만 했습니다.

그렇게 현자타임 같은 점심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그가 말합니다.

“신 대리, 공부 좀 많이 해야겠다. 그 만큼 알아서 회사 홍보 잘 할 수 있겠어? 가끔 도움 필요하면 나한테 얘기해. 오늘 보니까 홍보 별거 아니네.”

“후우~”

티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는 게 참 어렵다는 걸 깨달았던 오후였습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젊은 신씨는 젊지 않은 M 과장에 대한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 줄담배를 피워야 했습니다.

그 날의 찌글찌글한 기억 이후로, 춘권은 내 가슴에 ‘봄날의 주먹’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불현듯 궁금해집니다.

그 양반, 안 얻어터지고 잘 살고 있는지...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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