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혼자 하는 R&D 시대의 종말

김낙명 이화여대 전자공학과 교수

'기술의 늪' 빠진 국내 ICT업계

개방형 혁신 이룬 한미약품처럼

협업으로 R&D 생태계 주도해야

김낙명 이화여대 전자공학과 교수김낙명 이화여대 전자공학과 교수




지난해 8조원의 기술 수출에 성공한 한미약품의 사례가 업계를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개발(R&D)의 기본과 초심을 논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인내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자력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좁은 시야에서 탈피해 같이 연구하고 더 큰 과실을 얻자는 개방형 혁신(오픈 이노베이션)으로 이룬 성과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필자가 몸담아온 통신 분야에서는 지난 1990년대에 업계의 판도를 뒤바꾸는 협업의 역사가 있었다. 현재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11%(약 1,430억달러)의 가치를 창출하고 4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모바일 산업의 성공은 위험을 무릅쓴 지략적 파트너십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이동통신 서비스를 도입하던 1990년대 초반 글로벌 표준의 향방은 주파수를 시간 단위로 분할해 사용하는 시분할다중접속(TDMA) 기술이었다. 일본은 TDMA를 사용하기로 이미 결정을 했고 1세대 단말기의 선두주자였던 노키아·에릭슨·모토로라 등이 모두 TDMA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 표준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했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의 가치를 알아봤다.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보다 최대 수용량 측면에서 고작 3배 정도 우위였던 TDMA와 비교해 가치만 입증한다면 10배에서 20배까지도 더 수용할 수 있는 CDMA를 두고 모험을 택한 것이다. 이 결정은 한국이 글로벌 모바일 시장을 선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TRI와 삼성·LG 등의 제조사들은 CDMA를 개발한 미국의 작은 벤처 퀄컴과 손을 잡고 상용화에 나섰고 이후 무선통신 기술의 패권이 TDMA에서 CDMA로 완벽하게 넘어가자 국내 제조사들은 세계로 뻗어 나갔다. 데이터 품질과 통신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공조하던 이들의 파트너십은 현재 모바일을 넘어 모든 사물이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시대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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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약품 사례는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서 경험한 R&D 모델인 오픈 이노베이션이 타 분야에서 한 단계 진화한 모습으로 뿌리를 내린 사례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미약품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계 글로벌 제약사 사노피는 세계 제약업계에서 오픈 이노베이션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기업 중 하나다. 단순히 만들어진 기술을 사거나 판권만 확보하는 식이 아니라 물질 공동개발, 임상, 라이선스, 생산, 판매까지 신약이 탄생하고 가치를 발휘하는 전 과정에서 제약사·임상센터·바이오벤처와 관계를 맺어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고 파트너들이 핵심 동력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한미약품은 오픈 이노베이션의 틀로 과감히 뛰어들어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반면 요즘 ICT업계는 기가 속도의 무선전송이라든가 무수히 많은 IoT 객체 간의 지능형 무선정보통신, 나노·바이오 기술과의 컨버전스 등 비전만 무성할 뿐 당장 소비자의 수요에 맞닿아 있는 신기술·신제품을 창조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기술은 있는데 나만의 기술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테크노디플레이션’에 빠져든 것이다. 과감한 협업, 한 차원 높은 파트너십을 창조해야 할 때다.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마주한 시점에서 ICT 분야의 글로벌 표준과 정책의 틀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기업들이 역동적으로 글로벌 R&D 생태계의 구심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생태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R&D 투자는 승수(乘數)의 성공 효과를 얻고 실패마저 다음 성공을 위한 보험으로 만들게 된다. 가장 먼저 협업의 손을 내미는 선구자만이 이 같은 생태계의 리더십을 쟁취할 수 있다.

김낙명 이화여대 전자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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