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세월에 붙은 눈물 방울, 타지 마할



1631년6월17일, 인도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주 부란푸르(Burhanpur). 반란을 진압하러 친정에 나선 황제의 진영이 비탄에 잠겼다. 황후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망 원인은 30여 시간 산고(産苦) 끝의 출혈 과다. 건강한 딸을 낳은 황후 뭄타지 마할의 사망 소식에 한 살 위의 황제는 일 주일을 목놓아 울었다. 얼마나 애통했는지 머리카락마저 백발로 변해버렸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끌렸다. 15세의 인도 왕자와 페르시아 황실 혈통의 14세 소녀. 왕자는 이미 첫 부인이 있었고 혼약 자체가 정략적이었는데다 약혼 기간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긴 5년이었으나 둘은 1612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죽음이 운명을 가르기 전까지 둘은 100년을 해로한 부부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른 부인 둘에게 아이를 두 명 얻었던 무굴제국의 황제는 뭄타지 마할에게서 14명의 자식을 낳았다(절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남달리 총명했던 뭄타지 마할은 황제와 국정을 논의하고 때로는 중요 문서에 인장도 찍었다. 문화 예술을 적극 후원하면서도 영토 확장에 관심이 컸던 샤 자한은 전쟁터에도 뭄타지 마할을 데리고 다녔다.

남편을 따라 인도 남부의 반란 진압에 나섰다 출산 후유증으로 죽음을 앞둔 뭄타지 마할은 네 가지 유언을 남겼다. ‘나를 기억할 무덤을 지어 1년에 한번은 찾아오고, 재혼해서 남은 아이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이었다. 황제는 이 가운데 둘만 과도하게 지켰다. 황제는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의 궁전에서 잘 보이는 곳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짓는 대역사(大役事)를 일으켰다.

공사가 시작된 시기는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1632년 초.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연 ‘샤 자한(세상의 지배자라는 뜻)’은 무덤을 짓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인도는 물론 중동, 아시아와 유럽에서 당대 최고의 기술자를 부르고 최고급 자재를 들여왔다. 페르시아와 베네치아, 프랑스의 건축가와 오스만 튀르크와 중국 기술자까지 초빙했다. 한창 공사가 진행될 때는 코끼리 1,000마리가 자재를 날랐다.

기술인력과 인부도 평균 2만여명이 동원된 국제적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는 적지 않는 시간이 흘렀다. 무덤이 완공된 시기는 1643년. 11년이 걸렸다. 정원과 부대시설까지 전체 169,968㎡(5만1,415평)에 이르는 총공사는 1654년에야 끝났다. 공사기간 22년 동안 인도의 재정은 피폐해졌다. 당시 총 공사비 3,200만 루피. 요즘 가치로 약 9억 달러가 들었다. 공사에 동원된 민초들도 고역을 치렀다.


절대권력자의 별난 집념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지만 인류는 불멸의 문화유산 ‘타지 마할(Taj Mahal)’을 얻었다. 2002년 3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인도 문화를 극찬하면서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타지 마할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라고 말했던 바로 그 건축물이다. 무덤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 햇볕의 각도와 온도, 습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신비의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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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영원의 얼굴에 떨어진 눈물방울’이라고 읊은 타지 마할은 달러 박스다. 연간 8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 2차세계대전과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공습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거대한 대나무 보호막이 둘러쳐진 적도 있다. 관광객들은 ‘세월에 달라붙은 눈물 방울’이라는 타지 마할을 구경하려고 몰려든다.

타지 마할은 무수한 속설도 품고 있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게 블랙 마할 프로젝트. 아그라 궁전에서 ‘야무나 강’ 넘어 아내의 무덤을 지켜보던 샤 자한이 검은 대리석으로 똑 같은 규모의 ‘블랙 마할’을 지으려 했다는 것인데, 근거가 없다. 타지 마할처럼 아름다운 건축물의 등장을 막기 위해 공사가 끝난 후 기술자들의 손목을 잘랐다는 속설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샤 자한에게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폭정을 부각시키려고 대규모 공사가 또 시작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는 해석이 정설이다. 샤 자한은 아이들에게 자상하게 대하라는 아내의 유언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지 친아들에게 권좌에서 쫓겨났다. 재혼하라는 유언도 지키기 못했으나 가끔 하렘의 후궁들은 찾았다. 샤 자한은 공식 아내 셋 말고도 이름이 전해지는 여섯 명을 더 거느렸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민심을 흔든 것은 사실 같다. 아내가 죽기 1년 전인 1630년에는 남부 지역에 200만명이 아사(餓死)하는 대기근이 들었는데도 국가적 역량을 무덤 짓는데 기울였으니까. 1658년 아들의 반란으로 궁에 유폐된 샤 자한은 1666년 74세로 사망한 뒤 아내 옆의 석관에 묻혔다.(실제 시신은 석관 지하 층에 있다고 한다). 모든 게 좌우 대칭인 타지 마할에서 유일하게 대칭이 아닌 구조물이 샤 자한과 뭄타지 마할의 석관이다. 중앙에 아내의 관이 옆 자리에 남편의 관이 있다.

보름달 무렵 연못에 비친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타지 마할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타고르는 ‘어느 날 흘러내린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맑고 투명하게 빛나리라. 그것이 타지마할이라네’라고 노래했지만 타지 마할의 빛은 바래가고 있다. 산업화와 난개발로 인한 후유증 탓이다.

부근에 댐과 산업단지가 들어선 이후에 타지마할 옆을 흐르는 야무나 강물이 메말라 건축물들의 기둥이 내려앉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투명한 백색과 단아한 상아색을 뽐내던 대리석도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 때문에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인도 정부는 타지 마할 보전을 위해 부근 공장 지대를 옮기고 강물의 수위를 복원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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