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눈물의 지남호...한국 원양어업



1957년6월29일 부산항. 230톤급 지남호가 제1부두를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인도양. 한국 최초의 원양어업을 위한 출어였다. 지남호는 최신 선박. 미국이 1946년 49만 달러를 들여 해양조사선으로 건조한 워싱턴호를 한국 정부가 1949년 32만5,000만 달러에 사들인 배다. 거금이 투입된 이 선박은 크기가 작았어도 최신 조사선답게 냉장시설과 수심탐지기·어군탐지기 등 최신장비를 탑재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 선박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도입 직후부터 ‘남쪽 바다에서 돈을 벌어 오라’는 의미를 담아 ‘지남호(指南號)’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문제는 좋은 배를 갖고도 활용할 방법을 몰랐다는 점. 해양 생태계 조사나 어로 개척용으로 투입될 고성능 선박이 공무원들의 제주도 출장용이나 외자청 직원들의 외자 유치를 위한 외국인 투자자 유람용 정도로 쓰였다. 용도를 찾지 못하던 지남호는 민간의 창의력이 더해지면서 활로를 찾았다. 민간기업인 제동산업(濟東産業)에 원양어업을 통한 외환 획득을 조건으로 불하된 지남호는 기대를 받으며 부산항을 떠났다.


출항 인원은 20명. 선장을 포함해 선원은 17명이었으나 3명이 더 탔다. 남상규 해무청 어로과장이 단장, 이제호 중앙수산시험장 어로과장이 어업지도관 자격으로 동승했다. 요즘으로 치면 중앙부처의 정책과장이 동승한 셈이다.

국가의 관심이 그만큼 컸다. 남은 한 명은 미국인 모건(Mr. Morgan). 주한 미경제협조처(USOM) 어업 고문으로 한국 정부에게 원양어업에 나서라고 조언했던 인물이다. 모건은 미국의 통조림회사인 ‘밴 캠프’사에 한국 원양어선이 잡은 참치의 판로까지 연결해줬다. 참치잡이 어선 선장도 지낸 적이 있어 선장부터 선원까지 원양어업 경험이 거의 없던 지남호 선원들에게는 스승 격이었다.

막상 모건은 실제 조업에서는 큰 도움이 못됐다. 일본을 거쳐 대만 해협에서 시험 조업을 하던 도중 허리를 다쳐 하선한 탓이다. 유일한 경험자마저 없어진 상황. 목적지인 인도양에 이르기까지 지남호는 무수한 고비를 넘었다. 보조엔진이 파열돼 침몰 위기도 겪고 일부 선원들은 각기병에 걸렸다. 가장 큰 고민은 무지. 막연히 돈이 되는 고급 어종을 낚는다는 생각만 앞섰을 뿐 어떤 어종을 어떻게 잡는지는 전혀 몰랐다.

갖은 어려움 속에 지남호가 첫 낚시줄을 드리운 시기가 같은 해 8월15일 광복절. 경건한 마음으로 조업을 실시했으나 처음 몇 차례는 허탕. 어장을 옮기려던 순간 90㎏짜리 다랑어가 올라왔다. 15일간 조업을 계속한 지남호는 10톤의 어획물을 올렸다. 식수가 부족해 출항 108일 만에 당초 목표에 밑도는 실적으로 돌아왔으나 지남호는 어획고와 비견할 수 없는 대어를 낚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


제동산업은 지남호의 어획량 10톤 가운데 5톤을 미국에 보냈다. 항공편으로. 운임이 비싸 수지가 맞지 않았으나 약속은 지켰다. 마침 미국의 유명 수산잡지(Fish and Wild Life Service)가 지남호의 소식을 실었다. 미국 밴 캠프사는 한국과 추가 주문계약을 맺었다.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개척한 원양어업은 이때부터 탄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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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호가 잡은 새치 중에서 가장 큰 세 마리는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기분이 좋아진 이 대통령은 주한 외교사절단을 초청해 참치를 선물할 만큼 지남호의 시험조업 성공은 국가적 경사였다. 더 큰 경사도 있었다. 지남호는 이듬해 초 남태평양으로 출어해 50배나 많은 일본 어선단과 경쟁하며 1년3개월간 150톤의 어획고를 올려 ‘원양어업=확실한 돈벌이 수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이 소식은 한국일보를 통해 생생하게 알려지며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지남호가 개척한 원양어업은 60,70년대 달러 박스로 부각되며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송금액보다 14배 많은 달러를 벌어들였다. 최절정기는 1970년대 후반. 한때 859척의 원양어선단을 보유해 세계 2위권까지 넘봤으나 요즘은 400척 안팎으로 떨어진 상태다. 그나마 선원은 대부분 외국인이어서 선상반란 같은 해상사고도 적지 않다.

오늘날 한국의 원양어업은 분투하고 있으나 갈수록 입지가 좁아져 간다. 각국의 전관수역선포와 어업료 인상 탓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채이고 깨지고, 자원보유국의 텃새에 시달리고…. 한국 경제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다. 원양어업의 미래는 가늠할 수 없어도 과거는 분명히 남아 있다. 한국의 원양어업이 개발년도의 달러 박스였다면 그 주역들은 마땅히 기억되어야 한다.

제2지남호를 비롯해 먼 나라의 깊은 바다에서 침몰해 죽은 수많은 선원들의 희생 속에 대한민국이 있다. 아프리카 라스팔마스를 비롯한 세계 8개 지역의 무덤에 한국 원양어선 선원 327명의 영혼의 잠들어 있다.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들은 더 많다고 한다.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역만리 해역에서 거친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물고기를 잡다 숨져간 원양어선 선원들의 명복을 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일부 자료에는 출항일이 이보다 사흘 전인 26일로 나오지만 29일이 맞다. 26일은 제 1부두 옆 해양경비대 강당에서 출항기념식이 열렸던 날이다. 출항기념식에는 당시 김일환 상공부장관, 홍진기 해무청장(해무청은 수산청의 전신), 김진만 국회 상공위원장과 안상한 수산중앙회장 등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장도를 축하했다. 그만큼 국가적 행사였다.

**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의 창립자인 고 백상 장기영은 1958년1월 지남호의 서사모아 원양조업에 사회부 문제안 기자를 내보내 ‘원양어로선 지남호 동승기’를 12회 지면에 실었다. 기사가 나간 후 국민들과 기업의 관심이 높아지고 정부의 원양어선단에 대한 지원도 늘어났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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