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마음코칭] 마음은 무엇으로 씻어내고 청소하는가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외래교수

지금 마음먹은 내 생각조차

내일이면 금세 또 바뀔 수 있어

진지한 사색의 여유 가지며

자아정체성·지향점 돌아보길

정운 스님정운 스님




일제 강점기 때, 금강산에 ‘마하연’이라는 참선하는 선방이 있었다. 금강산 아래에 온천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인장은 불심이 매우 깊었다. 주인장은 스님들이 간혹 목욕하러 오면 목욕비를 받지 않았다. 한 스님이 목욕을 하러 갔는데 주인장은 스님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스님은 목욕을 다 마치고 문밖으로 나가면서 주인장에게 인사라도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주인장, 시원하게 목욕 한 번 잘했습니다. 몸을 씻으니 개운하군요.”

주인은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스님! 육신은 물로 씻어서 깨끗한데 마음은 무엇으로 씻으셨습니까?”

몸은 매일 씻고 얼굴도 하루에 두 번씩 세수한다. 때맞춰 집구석도 청소를 한다. 나이 들수록 값비싼 비누로 세수하고 몸을 위해 값비싼 보디워시를 사용한다. 또 명예욕과 탐욕은 나이 들수록 쌓여 파리의 에펠탑(Eiffel Tower)만큼 높아진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은 무엇으로 씻기고 어떻게 청소를 하는가. 마음과 관련된 또 한 가지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중국 당나라 때, 덕산(782~865) 스님은 오로지 ‘금강경’만 연구하는 불교학자였다. 스님은 북쪽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남쪽 지역 스님들이 경전을 부정하고 오로지 마음만 잘 닦으면 된다는 주장(不立文字)을 해 심기가 불편했다. 덕산 스님은 ‘부처님도 수많은 생을 거듭하며 수행해 부처가 됐는데 어찌 경전을 부정한단 말인가? 내가 그들을 만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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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풍주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점심시간이 돼 배가 고팠다. 마침 길가에서 떡을 팔고 있는 떡장수 할머니를 만났는데 할머니가 스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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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등에 무슨 짐을 그렇게 많이 지고 있습니까?”

“저는 금강경 학자인데 가방 안에 금강경과 관련된 책들입니다.”

“스님께서 금강경 학자라고 했는데 제가 질문을 하나 해서 스님께서 답을 맞히면, 떡을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스님, 금강경 구절에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 중, 마음을 어디에다 점 찍으시겠습니까.”

여기서 ‘마음에 점을 찍다’는 말이 한자로 ‘점심(點心)’이다. 점심은 우리나라에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중국에서는 배가 고플 때,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먹는 ‘간식’을 뜻한다. 점심이라는 뜻에 있어 중국과 한국의 쓰임이 다르다. 스님은 할머니의 질문에 답을 못했는데 요즘 말로 자존심이 많이 구겨진 것이다.

불교에서 이 이야기는 수행과 관련해 자주 회자되는 내용이다.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것이 내 마음이다’라는 현재 시점을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곧 현재라고 하지만 그 현재도 순간적으로 과거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또 ‘마음이 현재 시점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현재의 마음도 어떤 것이라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경로의 매체를 통해 사건·영화·지식 등 정보의 홍수에 빠져 산다. 게다가 게임이나 약물 등에 빠져 있는 의존성 인간들도 많다. 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으며 진정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마음이란 존재는 어떻게 씻기고 청소할 것인가. 잠시나마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배고픈 그대 영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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