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산업 모세혈관, 소공인 살리자]"후배들에 기술 전수…국산명품백 맥 이어야죠"

< 6 > 제이앤이 송공

日 패션기업 고액연봉 불구

가방산업 키우겠다는 일념

한국으로 돌아와 공방 마련

꺼리는 샘플 제작도 도맡아

김종은 제이앤이 송공 대표가 7일 서울 중랑구 공방에서 직접 만든 가방 견본품 진열장 앞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을 안고 있다./백주연 기자김종은 제이앤이 송공 대표가 7일 서울 중랑구 공방에서 직접 만든 가방 견본품 진열장 앞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을 안고 있다./백주연 기자




하얀 항아리 같은 독특한 모양의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은 채 가방 장인은 종이와 자를 바삐 움직였다. 7일 서울 중랑구에 있는 김종은 제이앤이 송공 대표의 공방을 찾았을 때 그는 가방의 패턴을 만들고 있었다. 패턴은 처음 디자이너가 제작한 가방 제품을 계속 생산해 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종의 도면이다. 유럽산 명품 가방에 도전장을 낸 국내 디자이너가 패턴 제작을 의뢰했다. 일일이 제품을 들여다보며 자로 재고 그려야 하는 탓에 가방 제조 공인들은 이 일을 꺼린다. 하지만 김 대표는 기꺼이 의뢰를 도맡아 해주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가 최초로 디자인 한 가방의 패턴을 제작하려면 기존 업무를 제쳐 두고 6~7일을 꼬박 매달려야 한다”면서도 “내가 조금 힘들어도 우리나라 브랜드의 가방 상품이 많이 제작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지한 김 대표의 태도에서는 장인 정신이 묻어났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가방 장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43년 전인 열 여섯 살 때 충청북도 영동에서 지금은 사라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가방을 수출하는 공장에 들어가 잔 심부름을 하며 보냈다. 기술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수출 기일에 맞추려면 일주일에 서너번은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김 대표는 잠을 줄였다. 주어진 잡무를 빨리 끝내놓고 선배들의 일을 도와준다고 하면서 조금씩 일을 배웠다. 퇴근 후 다른 직원들이 술 마시러 나가면 그는 공장에 남아 그 날 배운 기술을 반복했다. 응용해서 자신만의 노하우도 쌓았다. 독학하던 습관은 남아 장인이 된 지금도 외국 패션잡지를 자주 본다. 디자인을 눈에 담아 두면 가방 패턴을 작업할 때 제작 시간이 빨라지고 더 정교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일을 배우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렸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 1992년부터 공장 일감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김 대표는 지인의 소개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가방 공장에 취직했고 현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다 보니 사장의 눈에 띄었다. 사장의 추천을 받은 김 대표는 일본의 종합 패션회사 그룹에 입사하게 됐다. 그 당시 회사에서 제시한 연봉은 1억2,000만원으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유럽에 가방을 납품하는 회사였고 김 대표는 혼자서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한 유럽 명품 가방의 견본품을 제작했다. 바느질부터 조립, 패턴 제작 등 모든 공정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김 대표 뿐이었다. 그가 최초의 가방 제품 하나를 완성해야 비로소 해당 제품의 대량 생산이 시작됐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국내 가방 산업을 키우기 위함이다. 임가공비가 상대적으로 적어 일본에 있을 때보다는 덜 여유롭지만 젊은 인력 양성의 기쁨을 맛보는 중이다. 김 대표는 “우리 세대가 죽고 나면 가방 장인이 사라질 것 같아 강의를 시작했다”며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으려 하거나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가방 만드는 법을 전수하다 보면 국내 가방 산업도 성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주연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