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항아리 같은 독특한 모양의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은 채 가방 장인은 종이와 자를 바삐 움직였다. 7일 서울 중랑구에 있는 김종은 제이앤이 송공 대표의 공방을 찾았을 때 그는 가방의 패턴을 만들고 있었다. 패턴은 처음 디자이너가 제작한 가방 제품을 계속 생산해 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종의 도면이다. 유럽산 명품 가방에 도전장을 낸 국내 디자이너가 패턴 제작을 의뢰했다. 일일이 제품을 들여다보며 자로 재고 그려야 하는 탓에 가방 제조 공인들은 이 일을 꺼린다. 하지만 김 대표는 기꺼이 의뢰를 도맡아 해주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가 최초로 디자인 한 가방의 패턴을 제작하려면 기존 업무를 제쳐 두고 6~7일을 꼬박 매달려야 한다”면서도 “내가 조금 힘들어도 우리나라 브랜드의 가방 상품이 많이 제작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지한 김 대표의 태도에서는 장인 정신이 묻어났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가방 장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43년 전인 열 여섯 살 때 충청북도 영동에서 지금은 사라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가방을 수출하는 공장에 들어가 잔 심부름을 하며 보냈다. 기술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수출 기일에 맞추려면 일주일에 서너번은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김 대표는 잠을 줄였다. 주어진 잡무를 빨리 끝내놓고 선배들의 일을 도와준다고 하면서 조금씩 일을 배웠다. 퇴근 후 다른 직원들이 술 마시러 나가면 그는 공장에 남아 그 날 배운 기술을 반복했다. 응용해서 자신만의 노하우도 쌓았다. 독학하던 습관은 남아 장인이 된 지금도 외국 패션잡지를 자주 본다. 디자인을 눈에 담아 두면 가방 패턴을 작업할 때 제작 시간이 빨라지고 더 정교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을 배우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렸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 1992년부터 공장 일감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김 대표는 지인의 소개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가방 공장에 취직했고 현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다 보니 사장의 눈에 띄었다. 사장의 추천을 받은 김 대표는 일본의 종합 패션회사 그룹에 입사하게 됐다. 그 당시 회사에서 제시한 연봉은 1억2,000만원으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유럽에 가방을 납품하는 회사였고 김 대표는 혼자서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한 유럽 명품 가방의 견본품을 제작했다. 바느질부터 조립, 패턴 제작 등 모든 공정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김 대표 뿐이었다. 그가 최초의 가방 제품 하나를 완성해야 비로소 해당 제품의 대량 생산이 시작됐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국내 가방 산업을 키우기 위함이다. 임가공비가 상대적으로 적어 일본에 있을 때보다는 덜 여유롭지만 젊은 인력 양성의 기쁨을 맛보는 중이다. 김 대표는 “우리 세대가 죽고 나면 가방 장인이 사라질 것 같아 강의를 시작했다”며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으려 하거나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가방 만드는 법을 전수하다 보면 국내 가방 산업도 성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