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수수께끼의 정화 함대



수수께끼의 항해가 여기 있다. 명나라 초기 환관 정화(鄭和)의 남해 대원정. 항해의 목적에서 선박의 크기까지 모든 게 의문 투성이다. 확실한 점은 정화의 대항해 이후 중국의 바다는 닫혔다는 사실 뿐이다. 폴 케네디의 명저 ‘강대국의 흥망’에 따르면 정화의 탐험 이후 중국에서 단행된 ‘해외무역과 어업의 금지는 경제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다른 잠재적 동기들을 앗아가 버렸다.’

한 마디로 정화의 원정을 이어가지 못한 탓에 중국은 서구에 뒤졌다는 얘기다. 정화의 대항해가 무엇이기에 그럴까. 정화와 그 부하들이 남긴 기록을 보자. ‘우리들, 정화와 그 동료들은 야만 지역의 번국에 칙사로 가라는 황상의 명을 받들어 지금까지 7차례에 걸쳐 항해를 수행했다. …(중략) 우리는 그렇게 크고 작은 나라 3,000여개를 찾아갔다.’(중국 복건성의 한 비문). ‘우리는 10만리의 해역을 항해했으며 하늘까지 치솟는 파도를 보았다. 우리의 항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무자비한 파도를 괘속으로 통과하는 별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정화의 함대가 항해한 거리는 지구를 세 바퀴 반 이상. 방문지를 요즘 기준으로 나누면 37개국에 해당된다. 콜럼버스가 233톤짜리 범선으로 미 대륙을 발견한 게 1492년. 중국의 색목인 출신 환관 정화는 이보다 87년 앞서 대항해를 시작했다. 1405년7월11일 1차 항해에 나선 정화가 이끄는 함대의 인원은 2만7,800여명.* 함선은 보선(寶船) 62척을 포함, 240여척에 이르렀다.

대형 돛이 9개나 달렸다는 보선의 규모는 길이 44장4척(151.8m), 폭 18장(61.6m). 최대 8,000t, 적게 잡아도 1,250t이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1만7,000~2만t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도 있다. 중국식 허풍쯤으로 치던 보선에 대한 기록은 1957년 11m짜리 키가 발굴되며 사실에 근접한 기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다만 보선의 정확한 크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정화는 23년간 7차례의 항해를 통해 전세계를 누비며 인도네시아 팔렘방 등에 흔적을 남겼다. 정화의 분견대에 의한 미 대륙 발견과 세계 일주설도 나왔다. 영국 해군 장교 출신으로 주로 잠수함에서 17년간 근무했던 개빈 맨지스는 ‘1421년, 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2002년 출간)라는 책에서 치밀한 고증을 제시하며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 1421년 시작된 정화의 6차 원정시 본대와 별도로 활동한 3개 분견대가 2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세계 일주를 마쳤다는 것이다.

개빈 맨지스에 의하면 분견함대 중에서는 30여척 중에 단 5척만 돌아온 함대도 있었는데 지금도 중국계 주민과 문화가 남미 대륙에 남아 있다. 남미 대륙의 생태계와는 맞지 않는 아시아계 닭의 존재도 정화 함대의 분견대에 의해 퍼졌다고 맨지스는 주장한다. 맨지스는 심지어 콜럼버스도 정화함대가 남긴 항해 지도를 근간으로 서쪽으로 항해해 미주 대륙과 만났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 때문에 명나라는 23년 동안 연인원 18만명과 무수히 많은 예산을 투입해 바다를 뒤졌을까. 과연 야만인들에게 도자기와 비단을 전해주고 기린이나 타조 등을 얻으려 그 엄청난 자원을 투입했나. 설이 많다. ‘중국판 수양대군’격으로 정권을 탈취한 영락제가 사라졌다는 조카(건문제)의 행방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했다는 설에서 △명나라와 일전을 벼르던 티무르 제국 견제설 △ 순수 상업설 △중국 특유의 조공 체계 건설 목적설 △방계인 영락제가 비정통성 시비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는 설까지 해석이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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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의문인 가운데 확실한 점은 두 가지다. 먼저, 중국은 훗날 대항해에 나섰던 서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 달리 식민지를 건설하지도, 수탈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 교수는 ‘중국이라는 거짓말’을 통해 정화의 항해 목적이 아시아를 재정복하기 위함이었다고 강조한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 중국이었다는 것이다. ***

두 번째로 분명한 사실은 정화 이후 바닷길이 끊겼다는 점이다. 영락제 사후 득세한 유림세력들은 원양용 선박은 물론 항해기록까지 불태웠다. 명나라의 해상 세력은 다시는 먼 바다로 나가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을 도우려 연안함대용 함선이 일부 건조된 게 전부다.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이를 중국 뿐 아니라 동양의 쇠락을 가져온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철저하게 지워졌던 정화는 의도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보선을 복원하고 정화의 항해를 재연할 계획이다. ‘평화적이고 위대한 중국’을 만방에 떨치기 위해서다. 신저우(神舟) 유인우주선 계획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행사에서도 중국은 정화의 평화적인 항로 개척을 상징화해서 보여줬다. 정화의 대항해 시작 611주년. 같은 동양인으로서 자랑스럽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자랑스런 한족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남의 역사마저 훔쳐가는 중국의 굴기(堀起)와 역사를 반성하지 못하는 일본과 어깨동무한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모양새이니까. 중국이 바다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은 달리 말하면 오만에 해당된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우월하니 통교가 필요 없다는 오만이 중국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 셈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오만은 없을까. 나만 옳다는 편협과 오만이….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승무원 중에는 900명의 관원과 250여명의 의사, 수백명의 무희와 가수 등 여성도 동승했다. 우호적인 지역에 하선할 때 연회와 가무에 대비해서다. 식품 등 보급도 엄청난 수량이 들어가 정화의 함대는 명나라 국력의 연간 4%에 해당하는 예산이 들어갔다. 정화의 함대가 쓴 예산은 명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왔던 금액의 1.5배에 달한다고.

** 크기에 대한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목선이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목선은 재료 자체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대형선 건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목제 범선에서도 1만t 가까운 배들이 있었으나 주요 부분을 철제로 보강한 배들이어서 진정한 목제 범선은 아니다. 순수 목제 선박이던 18세기 이전 유럽 범선은 아무리 커야 2,000~3,000t에 머물렀다. 더욱이 길이가 44장4척(151.8m), 폭 18장(61.6m)이라는 기록이 정사에는 없고 사적 기록이거나 소설에 나오는 것이어서 신빙성도 떨어지는 편이다. 일부 비석에서는 보선의 크기가 300t 이내라고 적혀 있다. 이 정도 선박이라도 62척이 넘었다면 당시 최강의 함대였다.

*** 기 소르망 교수의 지적대로 정화 함대가 전투를 치르고 전사자를 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화 함대의 폭력 행위는 서구 정복자들이 저지른 수탈과 학살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조족지혈이었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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