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쇼군과 덴노...누가 일본 국왕인가?



일본력 1192년 7월12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쇼군(征夷大將軍)직을 받았다. 요리토모는 라이벌인 다이라 무사가문을 누른 1185년부터 일본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인물.* 국왕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하던 그는 쇼군에 제수되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바쿠후(幕府), 즉 사실상의 내각을 설치할 수 있기 때문. 요리토모는 사실상의 일본 국왕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바쿠후의 본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천막 관청. 동쪽의 오랑캐, 즉 홋카이도(北海道)의 아이누족**을 정벌하는 장군(將軍·쇼군)이 머무는 천막을 뜻했다. 쇼군이 참모들과 더불어 군대의 사무를 처리하는 기관을 바쿠후라고 불렀다. 일본 왕(덴노)이 전시도 아닌 평시에 쇼군을 임명하고 바쿠후 설치까지 동의했다는 것은 권력자인 요리모토에게 권력을 양도하겠다는 의미였다.


요리토모는 동쪽으로 40㎞ 떨어진 가마쿠라(鎌倉·오늘날 요코하마와 요코스카의 중간 동쪽 지점)에 바쿠후를 열었다. 덴노와 덴노의 신하들로 구성된 조정은 제사와 외교에 관한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권력을 빼앗겼다. 그나마 여몽연합군의 침공 이후에는 외교권마저 잃었다. 덴노가 권력을 넘긴 이유는 간단하다. 무력 집단인 무사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가마쿠라 바쿠후의 성립은 ‘권위(국왕)와 권력(쇼군)의 분산’이라는 일본 특유의 사회구조를 굳혔다. 물론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외척 또는 은퇴한 조우고(上皇·상황)가 실제 권력을 갖는 이중적 지배체제가 존재했으나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무사 집단이 중앙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군사정권의 지배는 덴노 세력의 일시적 반격이 성공한 3년여를 제외하고는 무로마치ㆍ도쿠가와 바쿠후를 거치며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1867년까지 672년간 이어졌다. 덴노는 끼니를 걱정하고 즉위식과 장례식마저 제대로 못 치르는 미약한 존재로 떨어졌다.**** ‘살아 있는 신’으로 부각된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근대국가 일본을 설계하면서 국가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 재탄생한 덴노는 ‘만들어진 전통’일 뿐이다.


일본의 역대 쇼군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에도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외적으로는 ‘일본 국왕’임을 자처했지만 대내적으로는 국왕이라고 칭한 적이 거의 없다.***** 실권도 없는 덴노 세력을 구태여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개인도 겉(다테마에·建前)과 속(혼네·本音)이 다르다는 일본답다. 혼네와 다테마에, 덴노와 쇼군, 쇼군의 내부 호칭과 ·대외 호칭과 이미지…. 은퇴와 가짜 은퇴까지. 일본에는 왜 이리 이중적인 게 많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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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중세 일본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긴 인물로도 유명하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역적으로 몰리고 복수와 치정, 러브 스토리, 형제간 골육상쟁 등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정작 미나모토 가문은 정권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바쿠후의 권력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가인 호조 가문으로 넘어갔다.

** 일본 북부에 사는 아이누족은 한때 인류사의 수수께끼였다. 키가 작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백인종의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와 습속, 언어도 일본인들과는 달랐다. 백인종의 일파로 보이는 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북해도 일대에 자리 잡았는지가 풀리지 않는 과제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백인종 일파가 아니라는 견해가 점차 우세해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인에 동화되고 만 아이누족이 남긴 흔적도 있다. 현대 일본인들이 동양인으로서는 수염과 털이 많은 이유가 아이누족과의 혼혈 때문이라는 것이다.

*** 공교롭게도 고려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무인 정권이 출범했다. 정중부의 난(1170)으로 시작된 무인정권은 최충헌 정권까지 약 100년을 지속했다. 반면 일본판 무인정권 격인 바쿠후 시대는 개항과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이어졌다. 고려의 무인들은 중앙귀족이었고 일본 무사집단은 무장 농민으로 출발해 귀족의 시종을 거치며 힘을 길렀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 조선도 역대 바쿠후의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여겼다. 일본 자신도 그랬다. 조선 전기인 1407년부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까지 183년간 68회나 조선에 파견된 역대 바쿠후의 일본 사절단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조선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조선에 사신을 보내며 자신을 ‘국왕’이라 칭했다. 일부 일본 사학자들은 동아시아 책봉 체계의 양대 축으로 중국의 천자와 일본의 덴노가 있었기에 조선 국왕과 일본 쇼군이 동격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턱도 없는 날조다. 역대 중국 황제는 통치자였던 반면 일본 덴노는 교토 궁성에서 유폐된 제사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무로마치 바쿠후의 쇼군 아사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명의 황제에게 신하로서 복속을 약속하며 일본국왕에 책봉한다는 서신을 받고 감읍했다고 전해진다.

***** 타계한 전임 쇼군을 ‘선왕(先王)’이라고 표현하는 기록이 일부만 전해지는 정도. 쇼군을 국왕으로 칭한 일본 자료나 기록은 거의 없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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