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인체 시계 통제자들

인체는 위기에 몰렸을 때 신진대사 시계를 느리게 움직여 가사(假死)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 일단의 의사들이 이 과정을 인위적으로 일으켜 인명을 구하려 하고 있다.



51세의 환경 교육가 켈리 드와이어는 미국 뉴햄프셔주 후크세트의 자택 인근에 있는 비버호수로 산책을 나섰다. 이후 몇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 무렵이 됐지만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남편 데이비드가 휴대폰과 플래시라이트를 들고 그녀를 찾기 위해 비버호수로 갔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호숫가의 오솔길을 뒤지던 남편의 귀에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불길함을 직감한 그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가면서 911 안전신고센터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현장에 도착한 데이비드는 얼어붙은 호수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목만 내밀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조심스레 구멍으로 다가간 그는 아내의 머리를 잡아 가라앉는 것을 막았지만 켈리는 조금씩 의식을 잃어갔다.


구조대가 그녀를 구출했을 때 체온은 15℃에 불과했다. 심장 박동은 너무 약해 측정이 불가할 정도였다. 그렇게 앰뷸런스에 실릴 때쯤 심장이 멈췄고, 심폐소생술(CPR)을 받으며 병원으로 후송됐다. 병원에 도착한 후에도 무려 3시간의 CPR이 이어졌다. 제세동기까지 동원됐지만 그녀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의사들의 체온 상승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부체온 또한 25℃를 넘지 못했다.




눈길을 산책하던 중 호수의 얼음 구멍[우측]에 빠졌던 켈리 드와이어[위]는 5시간 동안 의학적으로 사망했다가 의료진에 의해 되살아났다.눈길을 산책하던 중 호수의 얼음 구멍[우측]에 빠졌던 켈리 드와이어[위]는 5시간 동안 의학적으로 사망했다가 의료진에 의해 되살아났다.


데이비드는 아내를 잃을 거라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켈리의 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의사들은 그녀를 인근의 가톨릭 메디컬 센터로 재후송했다. 그곳의 의료진은 심장 우회장치를 부착한 뒤 혈액의 온도 상승과 정제, 산소 공급 조치를 한층 강도 높게 실시했다. 혈액 순환 속도 역시 더욱 높였다.

그러자 켈리의 체온이 서서히 상승했고, 의학적 사망 상태로 5시간이 지나고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2주일 후 그녀는 양쪽 손에 약간의 신경 손상만 입은 채 퇴원했다. 당시 켈리를 구해냈던 구조대는 집으로 돌아온 그녀를 보자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친구들은 5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녀를 ‘기적의 여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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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는 것은 이제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인간은 심정지가 나타나고 수분 만에 뇌세포 사멸이 진행된다. 그리고는 사망으로 가는 돌이킬 수 없는 열차가 출발한다. 하지만 심장이 멈추기 전 체온이 크게 낮아진 상태였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 경우 인체 신진대사가 느려지면서 매우 적은 양의 산소만 소비하면서도 영구적 세포 손상 없이 최대 7시간까지 가사 상태로 버틸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켈리의 생명을 구했던 심장 우회 장치를 비롯한 의학기기 및 의료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을 살려낼 확률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련의 연구자들이 한층 대담한 가설을 세우고, 타당성을 검증하고 있다. 그 가설은 바로 가사 상태를 인위적으로 유도해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지 여부다.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시간이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순간에 인체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 치료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전 세계 무수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만 매년 20만명 이상이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쳐 생을 마감한다.

인공 가사 상태 유도술의 주요 타깃은 외상에 의한 과다 출혈 환자와 심장 질환 수술 환자다. 후자의 경우 인공 가사 상태에서 수술을 진행, 조직 손상을 막는 것이 목표다. 일부 연구팀은 차가운 생리식염수를 환자의 정맥에 투입하는 방법을, 또 다른 연구팀은 약물을 통해 가사 상태를 유도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특히 이 분야에는 펜타곤의 관심도 지대하다. 전사자의 90%가 과다출혈로 숨지기 때문이다. 이에 펜타곤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2010년 3,400만 달러 규모의 ‘생체시간성(Biochronicity) 프로그램’을 출범, 인체 시계를 인위적으로 제어할 방안을 찾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연구자금을 지원 받고 있는 현역 군의관 매튜 마틴 대령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인체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방식을 알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알아내면 인위적 가사 상태를 유발, 인체 시계를 느리게 가도록 만들거나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사망하는 병사의 수가 획기적으로 줄어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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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애틀 소재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센터에 근무 중인 마크 로스 박사의 연구실에는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들을 다룬 신문과 학회지의 스크랩이 담긴 상자들로 가득하다. 노르웨이의 스키어,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의 13세 어린이, 조업 중 바다에 빠진 알래스카 어부 등 사례도 다양하다.

올해로 59세가 된 로스 박사는 20여년간 이 같은 사례들을 연구해왔다. 2007년에는 제브라피시와 선충의 생체시계를 조작해 가사 상태에 빠뜨리는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천재들의 상이라 불리는 맥아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외상 치료를 위한 가사 상태 연구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필자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로스 박사는 버건디 색상의 티셔츠와 컨버스 운동화 차림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수인사를 나누자마자 현미경 앞으로 돌아갔다. 실험용 접시 속에는 태어난 지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은 제브라피시 치어가 들어있었다.

“제브라피시 치어는 몸이 투명해요. 때문에 심장 박동과 꼬리로 향하는 혈액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죠. 이 두 요소가 생명의 핵심이에요. 저희 연구팀은 산소를 제거해 이를 자유자재로 온·오프하려 합니다. 전등 스위치처럼 말이에요.”

그는 실험용 접시를 투명 상자에 넣고는 튜브를 이용해 질소를 주입했다.

“밤새 이 상태로 놔둘 겁니다. 지금은 상자 속 공기나 저희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가 다를 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자 속 산소 농도는 10ppm으로 낮아집니다. 그 과정에서 제브라피시가 가사 상태에 빠져듭니다. 어떻게 깨우느냐고요? 내일 아침 상자 밖으로 실험용 접시를 꺼내놓기만 하면 됩니다.”

설명을 마친 그는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실험을 준비했다. 완벽히 동일한 발달 단계에 있는 선충들을 두 개의 실험용 접시에 담은 뒤 하나는 질소가 주입되는 투명 상자에 넣고, 다른 하나는 연구실의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것.

“이 실험은 가사 상태의 구현 여부보다는 그 효과의 측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로스는 질소 환경에 처한 선충의 경우 신진대사 속도가 점차 느려지다가 결국 가사 상태에 접어들 것이며, 일반 공기에 노출된 선충은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 상태다. 선충은 성장 속도가 빨라 내일이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질소를 공급받는 선충은 장기간의 우주여행을 위해 포드 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 영화 에일리언의 주인공들과 유사한 환경에 처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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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박사는 2000년대 초반까지 벌레나 물고기처럼 작은 동물에 한해 가사 실험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과학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람이 들어가기만 하면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리는 멕시코의 미스터리한 동굴이 소개됐었는데, 범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황화수소(H2S) 가스였다.

“H2S를 다량 흡입하면 의식을 잃습니다. 마치 죽은 듯 보이죠. 하지만 동굴 밖으로 옮기면 아무런 피해 없이 정신을 차려요. 그걸 보고 H2S를 좀더 큰 동물의 가사 상태 유도에 응용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과는 예상보다 놀라웠다. 실험용 쥐를 실온에서 80ppm의 H2S에 노출시키자 가사 상태에 빠졌고, 일반 공기를 공급하면 신경계에 어떤 피해도 없이 깨어났던 것이다. 로스 박사에게 이는 퀀텀 점프의 계기가 됐다. 의학계도 이 성과에 주목했다. 심장마비 환자와 암 환자의 치료에 큰 잠재력을 가졌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로스 박사는 여러 독성가스에서 얻은 화합물들을 활용, 가사 상태 유도 기체로서의 효용성을 확인하고 있다. 물론 모든 작업은 방제·중화설비와 보안카메라, 경보장치 등이 갖춰진 별도의 실험실에서 이뤄진다.

“저희가 다루는 가스는 인간에게 치명적이에요. 예컨대 셀렌화물과 시안화물, 일산화탄소에 노출되면 2분 내에 사망에 이릅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 녀석들이 생명을 구할지도 몰라요.”

로스 박사는 황(S)과 브롬(Br), 요오드(I), 셀레늄(Se)을 ‘4대 감속제 원소(ERA)’라 칭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 몸속에 소량 존재하는 이 원소들은 인체의 산소 사용 속도를 줄일 수 있다. 제브라피시 실험 결과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면 ERA를 이용해 인공 가사 상태를 유도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로스 박사팀은 ERA를 주사약 형태로 개발, 재관류 손상(reperfusion injury) 방지제로 사용할 방안을 모색 중이다. 재관류 손상은 심장마비나 뇌졸중처럼 혈액 순환이 중단됐다가 치료 및 수술을 통해 재개됐을 때 혈액과 함께 다량의 산소가 일시에 밀려오면서 심장 조직에 영구적 손상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재관류 손상은 만성 심장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또 만성 심장질환은 전 세계 사망 원인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죠.”


연구팀은 돼지 실험에서 ERA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돼지의 관상동맥 폐색을 치료하기 전 ERA를 주입하자 심장 근육의 재관류 손상 확률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낮아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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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폐색 환자의 정맥에 요오드화나트륨을 주입하면 표준 치료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심장 손상 가능성을 75%나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심장 박동을 일시적으로 늦춰 재관류에서 심장을 지키는 겁니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로스 박사는 2014년 바이오 제약사 페러데이(Faraday)를 설립했다. 그리고 2017년초 ERA를 인간 심장마비 환자에게 임상 시험한다는 목표 아래 기술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 샘 티셔먼 박사팀의 한 연구원이 기계를 이용해 혈액을 차가운 생리식염수로 대체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미국 메릴랜드대학 샘 티셔먼 박사팀의 한 연구원이 기계를 이용해 혈액을 차가운 생리식염수로 대체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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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러데이 제약은 로스 박사가 근무하는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센터에서 5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3월 처음 방문했을 때 전직 외과의사 출신인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븐 힐이 필자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는 로스 박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적 생명작용으로 위독한 환자를 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료돼 작년 9월 CEO 자리를 수락했다.

“특정 환경을 조성해 인체의 산소 이용 방식을 바꾼다면 환자의 손상된 조직이 완전히 죽는 대신 일시적 동면(冬眠)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 기술로 얼마나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로스 박사와 힐 CEO는 ERA가 장기 이식이나 사지 이식을 포함한 다양한 의학적 상황에서 팔방미인으로 활약하는 날을 꿈꾼다. 다만 첫 타깃은 앞서 언급했듯 관상동맥 폐색에 따른 심장마비 환자가 될 공산이 크다. 총상, 교통사고 등 긴급한 치료가 필요한 외상 환자 역시 유력한 후보군이다. 참고로 미국 동부의 여러 의료 전문가들은 심각한 외상 환자들에 대한 인위적 가사 상태 유도 기술의 임상시험에 찬성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한편 미국 메릴랜드대학 볼티모어 캠퍼스 의대의 중환자·외상치료 교육센터장인 샘 티셔먼 박사는 ‘가사 상태 유도’라는 용어를 싫어한다. 대신 ‘응급 보존과 소생(EPR)’을 그 이음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가사 상태 유도는 왠지 공상과학적 단어로 들립니다. 하지만 EPR은 마치 새로운 종류의 CPR 같은 느낌을 줘서 대중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어요. 이 기술의 지향점이 충분한 시간동안 환자의 출혈을 멈춰 치료한 뒤 정상으로 소생시킨다는 점에서 결코 틀린 용어가 아닙니다.”

어쨌든 그는 로스 박사팀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사 상태를 유도하려 한다. 환자의 체온을 강제로 낮춰 저체온 상황을 유발하는 게 그것이다. 얼음 호수에 빠진 켈리의 몸에서 일어났던 반응을 재현하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이를 위해 환자의 혈액을 차가운 생리식염수로 교체하려 합니다. 그러면 심부 체온을 10~13℃까지 빠르게 낮출 수 있어요. 너무 극단적인 방법으로 들리나요? 예상대로만 된다면 생명을 살릴 기술입니다. 작년에만 344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볼티모어에서라면 더욱 그렇죠.”

티셔먼 박사에 따르면 총상 등 외상 환자에 대한 통상적 치료절차는 호흡관 삽입으로 시작된다. 호흡을 확보한 뒤에는 정맥에 카테터를 삽입, 몸에서 빠져나간 체액과 혈액을 보충하는 동시에 환자의 심장이 멎기 전 부상 부위의 치료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의사들이 시간에게 질 때가 많아요. 단적인 예로 외상에 의한 심장마비 환자는 생존율이 단 5~10%에 불과합니다.”

반면 저체온 상태를 유도할 경우 의사들은 약 1시간의 시간을 추가로 벌 수 있다. 수술 후 혈류를 정상화하고, 천천히 체온을 높이면 정상 상태로 회복된다.

티셔먼 박사팀은 20년 이상 동물실험을 통해 이 기법을 다듬는데 힘써왔다. 그 노력의 결과, 2014년 미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피츠버그대학 산하 UPMC 장로교 병원에서의 임상시험을 공식 허가받았다. 티셔먼 박사는 지금껏 이 기법을 적용받은 환자가 있었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았지만 임상 1상을 성공리에 마치고 2상과 3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만일 인간에게도 동물 실험과 동일한 효과가 발현된다면 외상에 의한 심장마비 환자의 생존율을 두 배로 높일 수 있습니다. 생존율에 있어 5~10%와 20%는 정말 엄청난 차이예요. 게임 체인저라 부를 수 있을 만큼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의 미군 야전병원 의무병들이 부상당한 병사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다. 이들은 심각한 외상을 입은 부상병이 발생할 때마다 시간과의 사투를 벌인다.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의 미군 야전병원 의무병들이 부상당한 병사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다. 이들은 심각한 외상을 입은 부상병이 발생할 때마다 시간과의 사투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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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장비가 가득한 병원에서 환자를 살리는 것과 가장 가까운 의료시설이 수백㎞ 밖에 있는 전쟁터의 부상병을 살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현역 군의관인 매튜 마틴 대령이 해결해야할 핵심 난제가 여기에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4차례의 파병 생활을 경험한 뒤 전장에서도 티셔먼 박사팀과 동일한 결과를 얻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일선 전투현장에 가져가기 힘든 고가의 의료기기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최대 걸림돌이었죠.”

그래서 그는 인체의 생체시계가 느리게 가도록 만드는 도구로서 화학물질, 정확히 말해 차갑지 않은 실온 상태의 화학물질을 활용하려 한다. 일정 시간만이라도 혈류가 불필요할 만큼 인체의 혈액 필요량을 줄이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마틴 대령은 지금껏 소속부대인 워싱턴주 마디간 육군 의료센터(MAMC)에서 틈틈이 관련연구를 실시했다. 한번은 외상을 입어 출혈이 심한 실험용 돼지에게 후보약물을 투여해 생리적 반응을 관찰하기도 했다.

“의무병의 가방이나 군복 뒷주머니에도 휴대 가능한 이른바 ‘포켓 치료제’를 개발하고 싶습니다. 이를 부상병에게 주사하기만 하면 가사 상태에 돌입시켜 수술실로 후송할 시간을 버는 거죠.”

그는 동료들과 함께 ‘포스포이노시티드 3-키나아제(PI3K)’라는 일련의 효소들이 신진대사 억제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이 계열 효소들의 활성화를 제어하는 약물을 발견, 암 치료제로서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마틴 대령의 초기 동물실험에 의하면 심장으로 유입되는 혈류량의 부족으로 국소 빈혈, 즉 허혈(虛血)이 생겼을 때 이 약물을 투여해 신진대사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동물에게는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고 말이다.

사실 마틴 대령이 이 분야의 연구에 뛰어든 것은 개인적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2007년 그가 바그다드 전투지원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일병 계급의 한 병사가 실려 왔다. 그 병사는 급조폭발물(IED)에 피폭당해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었고, 파편이 복부를 관통한 상태였다. 또한 폐 한쪽에 타박상이 있었고, 갈비뼈 복합골절 진단도 받았다.

“긴급 수술을 받고는 대형 병원으로 이송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죠. 하지만 중환자실로 옮기자마자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체내 산소 농도가 급락했고, 폐 내출혈을 일으키더니 심장마비가 왔습니다.”

결국 마틴 대령과 의료진은 병사를 떠나보내야 했다.

“최신 장비를 갖춘 병원이었다면 폐의 내출혈을 멈출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런 장비가 없었어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침상 옆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로스 박사는 자연계에선 가사 상태가 결코 기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데 박테리아 포자는 대다수 시간을 가사 상태로 보내는데, 개별 세포 형태로 최대 2억5,000만년을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로스 박사는 자연계에선 가사 상태가 결코 기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데 박테리아 포자는 대다수 시간을 가사 상태로 보내는데, 개별 세포 형태로 최대 2억5,000만년을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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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로스 박사팀도 ERA를 휴대형 주사약 형태로 개발하려 한다. 임상시험을 거쳐 FDA 승인을 획득하기까지는 무수한 난관을 극복해야하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ERA의 잠재적 효용성은 무궁무진하다. 로스 박사는 ERA를 망치로 비유해 설명했다.

“망치를 발견했다고 믿는다면 그걸로 나무에 못을 박을 수 있는지 확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망치의 효용성과 가치를 확립해 놓으면 사람들 스스로 망치를 가지고 가구를 만들고, 철판을 펴고, 물건을 부수는 등 활용처를 찾아냅니다. 꿈의 세계가 펼쳐지는 거죠.”

선충들이 잠든 지 하루가 지나 로스 박사는 두 실험용 접시를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예상대로 질소 상자 속 선충들은 성장하지 않은 반면 실험실 작업대 위의 선충들은 부쩍 자라 있었다. 또한 질소 상자 속 선충을 신선한 공기에 노출시키자 오래지 않아 생기를 되찾았다.

로스 박사팀의 ERA가 인간 외상 환자를 구하기까지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쩌면 임상시험에서 예기치 못한 유해성이 발견돼 연구 자체가 좌초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미경의 백색광 아래서 선충들이 부활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본 필자로서는 그런 날이 반드시 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선충들에게 지난 하루는 멈춰 있었을 테지만 필자에게는 미래를 엿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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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RA Elemental Reducing Agent.
EPR Emergency Preservation and Resuscitation.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편집부/BY RENE EBERSOLE

By Rene Ebers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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