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일제의 단천 농민학살…그리고 망각



1930년 7월20일 함경남도 단천. 농민 위주의 군민 2,000여명이 단천경찰서로 몰려들었다. 삼림조합의 폐해에 항거하다 붙잡힌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농민 숫자가 불어나자 경찰은 무차별 발포로 맞섰다. 15명이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20여명이 다쳤다. 중상자 가운데서는 추가 사망자가 나왔다.* 대공황 시기에 발생한 최초의 대중적 반일 항거인 단천 삼림조합사건과 농민학살의 단면이다.

농민학살의 도화선은 삼림조합 간부의 임산부 폭행. 남몰래 나무를 캤다는 혐의로 당사자는 물론 부인까지 구타하고 감금하자 쌓이고 쌓인 불만이 터졌다. 더욱이 구타와 폭행을 당한 부인이 임산부여서 단천 군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삼림조합에 대한 원성은 과중한 조합비 부담 때문. 쌀 가격이 1되에 22전이던 시절, 삼림조합은 1정보당 75전씩 조합비를 받아갔다. ‘4~5일이 한 번이나 쌀밥을 목에 넘기던’ 단천 군민들은 조합비를 대느라 더욱 곤궁해졌다. 조합비는 물론 묘목비까지 강제로 받아가던 조합의 임산부에 대한 반 인륜적 가혹행위가 화약 심지에 불을 붙인 셈이다.


삼림조합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삼림수탈 극대화를 위해 1913년부터 시작한 민간조합. 겉만 민영이었을 뿐 실제로는 동양척식회사와 스미토모임업(住友林業)·미쓰이(三井)합명회사 등 일본 자본이 조선의 삼림자원을 빼내기 위해 설치한 식민지 수탈기구였다. 일제의 간교한 술책으로 이미 전국 삼림의 80%가 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를 거쳐 일본자본에 넘어간 상황. 대부분 지역은 일제의 수탈에 고개를 숙였지만 단천은 달랐다. 지식인들의 농촌 교육과 농민 조직화로 시작된 농민운동으로 어느 지역보다 농민운동의 조직 기반이 탄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절대 가난도 농민들의 단합 요인이었다. 일제가 산미증산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추진한 수리조합과 식민지 농업정책의 과실은 일본인과 일부 조선인 지주에게 돌아갔을 뿐, 자영농들은 대거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농민들은 몇 년간 지속된 흉작에서도 세계적인 농산물 가격 하락 현상과 각종 준조세라는 삼중고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단천 지역에서는 특히 일제가 강권한 잠업(蠶業·누에고치와 뽕나무 기르기) 사업으로 현금 지출 요인이 많았다. 대공황으로 인한 누에값 하락은 단천 농민들을 더욱 궁핍으로 내몰았다.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에 삼림조합은 임업자원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개인소유 삼림까지 벌목은 물론 벌채와 나물 채취까지 막았다.*** 땔감에서 나물류, 짐승 가죽 등 생계수단을 제공하던 산을 빼앗기고 조합비까지 뜯겼던 단천 농민들의 분노와 의거는 무력으로 진압됐지만 전국 농민들의 저항운동으로 이어져 1932년 일제의 삼림조합 폐지를 이끌어냈다.


단천학살은 독립운동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천 농민들의 봉기가 청년회와 농민동맹 등 조직의 힘이었다는 사실에 자극받은 지식인 청년들은 농촌으로 내려갔다. 농민층과 그 자녀 교육에 힘을 쏟기 위해서다. 요즘은 시들하지만 대학생 농촌봉사활동의 뿌리인 일제 강점기하 농촌계몽운동도 단천 학살 이후 더욱 넓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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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천 농민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에 사회주의 계열이 많았기 때문일까. 민족의 자랑스러운 항거와 투쟁인 단천 농민운동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 기초자료가 적지 않은데도 관련 연구논문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우리 정부는 단천농민운동을 딱 한번 기렸다. 시위 당일 일제 경찰에 피살된 애국지사 김창언 선생(1899~1930)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게 전부다. 그 시기가 지난 2002년. 요즘에는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자는 목소리는 더욱 움츠러 들었다. 고약한 세월,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죽어간 조상들을 볼 낯이 없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동아일보 1930년9월22일자 3면 ‘端川衝突事件(단천충돌사건) 崔昌鳳 等判決(최창봉등판결)’에 따르면 일제 경찰의 발포로 숨진 사망자는 모두 23명이다.

** 단천 지식인들은 초기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지국장’이라는 이름 아래 주재 기자와 보급소장을 겸하던 기자들로 구성된 ‘단천 기자단’도 농민 조직화에 기여했다. 정작 일부 기자는 7월20일 봉기에는 등을 돌리고 아예 참여하지 않아 공분을 샀다.

*** 일제는 강제적으로 면 단위의 삼림조합을 군 단위로 확장하려고 애썼다. 단천군 삼림조합 창립 총회(1930년5월1일)에 1만5,000여명의 삼림소유주 가운데 면장이나 구장 등 100여명만이 경찰의 보호 아래 ‘비밀 결사’하듯 참석했다는 점은 삼림조합이 얼마나 불신 받았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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