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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44년째 현역 태진아 "한국인 희로애락 담은 트로트로 '컬래버 무대' 꾸준히 선보일래요"

1973년 '추억의 푸른언덕'으로 데뷔

美 생활 접고 89년 '옥경이' 발표 히트

'거울도 안보는 여자' 등도 인기몰이

쉽고 흥겨운 '태진아표 트로트' 각인

신곡 낼때마다 음악방송서 후배와 호흡

올 가을엔 래퍼 제시와 부를 노래 선봬

스타는 저멀리 혼자 빛나기만 해선 안돼

팬들에 먼저 다가가고 봉사활동 힘써야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대중음악 장르는 트로트다. 노래방에서 트로트 하나쯤은 불러줘야 분위기 좀 맞출 줄 아는 센스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다만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았으며 박자와 리듬은 경박하고 가사는 점잖지 못하고 통속적이라는 이유 등으로 트로트는 ‘공식적으로’ 소외되기도 했다. 반면 ‘비공식적으로는’ 대중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엔카의 영향을 받았든 엔카에 영향을 줬든 트로트는 어쨌거나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더없이 적합하다고 평가한다.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에 흥과 애절함이 모두 표현된다는 것. 지난 1973년 ‘추억의 푸른 언덕’으로 데뷔한 후 ‘옥경이’ ‘거울도 안 보는 여자’ ‘미안 미안해’ ‘노란 손수건’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사랑은 아무나 하나’ 등 심금을 울리면서도 흥겨운 노래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트로트의 가왕(歌王)’ 태진아(63·사진)를 최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위치한 진아엔터테인먼트에서 만났다.


기자는 대뜸 “한국인에게 트로트는 어떤 음악이에요?”라고 물었다. 44년째 가수 생활을 하고 있는 그에게 이 질문은 가장 쉬울 수도, 가장 어려울 수도 있는 질문인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우리나라 노래죠”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어 “모든 음악이 그렇겠지만 (트로트는) 우리의 희로애락을 다 담을 수 있는 것 같아요. 트로트 중에는 신나는 곡도 많지만 ‘목포의 눈물’ 등 옛날 노래를 들으면 참 구슬프죠. 옛날 노래 들어보면 한국인들이 무엇을 겪어냈는지 알 수 있죠.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이별을 이야기하는 노래도 많지만. 신나고 희망적인 곡도 있고, 그런 것이 그냥 다 우리나라 노래이지 않나 싶어요.”

“희미한 불빛 아래 마주 앉은 당신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구나. 너도나도 모르게 흘러간 세월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도 대답 없이 고개 숙인 옥경이.”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1989년 발표한 ‘옥경이’라는 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톱스타’가 됐다. ‘옥경이’가 수록된 태진아 2집은 당시 150만장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후 앙코르 곡을 부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옥경아”를 외치며 울부짖던 모습도 대중이 강하게 기억하는 그의 모습 중 하나다.

“이제는 다들 아시겠지만 ‘옥경이’는 아내의 본명인 ‘옥형’의 애칭이에요. 미국에서 행상하면서 힘들게 생활할 때 남진 선배님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어요. 미국 생활 접고 한국에 와서도 힘들었는데 그래도 다시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요. 원래 나는 가수였으니까. 그래서 당시 음반을 취입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옥경이’가 히트를 한 거예요. 저랑 같이 살아주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때 그렇게 운 것 같아요. 고마운 마음에.”

그는 히트 작곡가 임종수에게 ‘옥경이’라는 곡을 받게 된 이야기도 들려줬다. “원래 제목은 ‘고향 여자’였어요. 나훈아 선배님하고 설운도씨에게 이 곡이 갔는데 음반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저에게 왔는데 멜로디 세 개랑 노래 제목을 ‘옥경이’로 바꿔서 작곡가·작사가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오케이’를 해주셨어요. ‘고개 숙여 울던 너’를 ‘고개 숙인 옥경이’로 바꾸고 멜로디도 끝 부분을 올렸죠.”

‘옥경이’의 히트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이듬해 ‘거울도 안 보는 여자’로 가요 방송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그해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어 ‘미안 미안해’ 등 따라 하기 쉬우면서도 흥겨운 ‘태진아 표 트로트’도 잇달아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가수 데뷔는 우연이었다. 가수나 연예인에 대한 꿈도 없었다. 하루 세끼 배불리 먹는 것이 중요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던 것. 충북 보은 출신인 그는 동생 세 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상경해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는데 원래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 일을 할 때도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 이 식당을 찾은 유명 작곡가 서승일의 눈에 띈 것. “제가 원래 힘든 때든 어떤 때든 노래를 잘 불러요. 그날도 일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서 선생님이 오셔서 ‘목소리가 특이한데 노래 한 번 해봐라’ 그러셨어요. 그러고는 며칠 후 선생님의 사무실을 찾아갔고 그 후로 연습을 하면서 가수가 됐죠. 가수뿐 아니라 뭐가 되고 싶다 이런 것 자체가 없었어요. 저는 돈이 없어 국민학교(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으니까 동생들이라도 공부시키고 먹여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40년 넘게 가요계에 몸담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1999년 평양 공연을 꼽았다. 당시 방송사 최초로 SBS가 그해 12월 ‘평화친선음악회’를 평양에서 개최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동생인 대중가수 로저 클린턴이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개최할 때 SBS가 합동공연 형태로 참여한 것이다. 당시 한국 대표 가수로 태진아를 비롯해 설운도·핑클·젝스키스 등이 초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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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곡’하고 ‘옥경이’ 두 곡을 부르기로 했고 리허설도 마쳤는데 공연 직전 ‘옥경이’는 못 부른다고 북한 당국에서 그러더라고요. ‘어버이 수령 김일성’ ‘김정일 지도자 동지’ 외에 노래 등에 개인의 이름이 들어가서는 안 된대요.” 방북 당시 목격한 북한 주민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6박7일간 북에서 남쪽을 볼 수 있는 판문점도 가봤고 주민들 사는 모습도 봤는데 정말 힘들게 살더라고요. 또 땔감으로 다 썼는지 평양에서 개성까지 가는데 산에 나무 하나가 없었어요. 묘향산에 가니까 좀 나무가 있기는 했어요. 비참할 정도로 못 살아서….”



그는 지난해에는 ‘진진자라’, 올 초에는 ‘자식 걱정’ 등 새 노래를 끊임없이 선보이면서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 특히 중독성 있는 가사 때문에 ‘진진자라’는 대학수학능력시험 금지곡이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는 젊은 가수들과의 컬래버레이션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2014년 한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수 비와 ‘라송’을 함께 부르면서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그 덕택에 그는 ‘비진아’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젊은 세대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K팝 가수뿐 아니라 트로트 가수 장윤정, 성악가 김동규 등과도 장르 구분 없이 컬래버레이션을 계속해 선보이고 있다.

“아직도 저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과 함께하고 싶어요. 올가을에는 제시하고도 노래를 할 것 같아요.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지금 만들고 있어요.” 또 그는 신곡 발표 때마다 젊은 가수들 일색인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곡 나오면 아이돌 등 젊은이들이 서는 무대에 나가는 것이 좋지 않나 싶어요. 그 대신 어린 친구들이 보는 프로그램이니까 제 노래가 좀 안 맞을 수도 있어 편곡을 해서 불러요.”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동차에는 접착식 메모지가 수없이 붙어 있다. 누구와 언제 어디에서 만나는지를 직접 챙기기 때문이다. 방송 활동뿐 아니라 경조사 관련 메모도 빼곡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붙여놓죠. 일정이 끝나면 메모지를 떼고. 그래야 잊지 않고 약속을 지키죠. 경조사도 빠지지 않고 가능하면 일찍 가고 상을 당한 곳에는 시간이 되면 발인 전에 두 번도 가고 그래요.”

선후배 사이에서의 인기 비결은 바로 이런 인간적이고 진실한 모습에서 나온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현역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비결에 대해서도 들어봤다. “가수로 활동하는 아들 이루에게 스타라는 것이 너무 멀리서 혼자 빛나면 안 된다고 늘 말하거든요. 팬들이 먼저 사진 찍자고 하기 전에 먼저 청해보기도 하라고 해요. 반짝하고 사라질 것 아니면 친근하고 친숙한 모습이어야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베풀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꼭 베풀라고도 해요. 저도 시간 되면 봉사활동도 하고 제 노래가 필요하다고 하는 곳이면 찾아가 제 모습을 보여드려요. 그동안 사랑해주신 팬들에게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어요.”

사진=송은석기자

He is...

<수상 내역>

△1974 MBC 10대가수가요제 남자신인상 △1991 제2회 서울가요대상 대상 △1999 한국방송공사 성인부문 올해의가수상,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 본상 △2002 문화관광부 문화의날 옥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특별상, MBC 10대가수가요제 10대가수상, KBS 가요대상 성인부문 최고가수상, SBS 가요대전 트로트부문상 △2004 제19회 골든디스크상 트로트상 △2006 SBS 가요대전 트로트부문상, 제16회 서울가요대상 성인가요부문 본상 △2010 Mnet 아시안뮤직어워드 성인음악상 △2011 KBS 연예대상 라디오DJ상 △2012 제12회 대한민국전통가요대상 특별공로상 △2013 KBS 라디오 골든보이스, 제47회 납세자의날 대통령 표창 △2014 MBC 가요베스트 공로상

연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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