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갈등을 극복한 싱가포르의 번영



1964년7월21일 오후 2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계 2만5,000여명이 거리 행진을 펼쳤다. 예언자 무함마드 알리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212개 이슬람 단체가 참가한 행진 열기에 고조된 오후 5시께부터 중국인들과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족 분규가 발생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연방 싱가포르주 리콴유(李光耀) 주지사는 중앙정부에 진압 병력을 요청하는 한편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싱가포르가 가장 우려하던 민족간 폭동이 일어난 이유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다만 대략 세 가지가 원인으로 거론된다. 가장 유력한 설은 화교(華僑) 경찰관과 말레이인 행렬간 시비. 탄신 축하 행렬에서 뒤떨어진 일단의 말레이인들에게 경찰이 ‘빨리 행렬에 따라 붙으라’고 요구하자 반발하며 소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계 시민들이 무함마드 탄신 행렬에 노골적으로 불손하게 굴었다는 것인데, 개연성은 충분하다. 부유한 중국계는 대부분 말레이계를 깔봤으니까. 무슬림의 행렬에 빈 병이 날아들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당시에 거론됐던 세 번째 사유는 외부 세력 개입설. 말레이시아 연방과 대립하던 인도네시아의 심리전 요원들이 탄신 축하행렬에 끼어들어 군중을 부추겼다는 추론이다. 증거가 없지만 당시 외신들은 여기에 방점을 찍어 기사를 썼다. 말레이시아 연방의 라작 부총리와 리콴유 싱가포르 주지사가 “시위의 배후에 인도네시아와 중국계 공산세력이 있다”고 지목했기 때문이다.

과연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폭등의 배경만큼은 확실하다. 싱가포르주는 물론 말레이시아 연방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던 중국계에 대한 말레이계의 경계심. 제 발로 말레이시아연방에 들어온 싱가포르가 중국계를 단합해 정치권력마저 넘볼 것이라는 우려가 말레이계 인종 폭동의 배경이었다.*

한번 붙은 말레이인들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무함마드의 탄신 행렬에 참가한 무슬림 전체가 시위대로 변했다. 시위대는 경찰과 중국인에게 돌을 던지고 차를 부쉈다. 시위 현장을 찾아온 리콴유 주지사(당시 41세)가 트럭 위에 올라 냉정을 찾자고 호소했으나 소용없었다. 통행금지령 속에서도 말레이계와 중국계는 서로를 죽이고 건물과 차량에 불을 질렀다. 11일 동안 계속된 폭동으로 건물 수백채가 불탔다. 인명피해도 컸다. 36명이 죽고 556명이 다쳤다. 군경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사람도 3,568명에 이르렀다.

싱가포르주 경찰은 물론 말레이시아 연방 경찰과 연대급 보병부대 투입으로 겨우 진정됐던 민족 분규는 9월 초 다시 일어났다. 중국인들의 주거지역에서 삼륜차를 몰던 말레이인 운전기사가 죽은 채로 발견된 탓이다. 앙금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중국인들의 소행으로 여긴 말레이인들은 거리에서 ‘중국인은 물러나라’고 외쳤다. 여기서도 13명이 죽고 106명이 다쳤다.


두 차례에 걸친 민족 분규를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울고 싶은 데 뺨 맞았다’고 여겼다. 싱가포르주에게 연방 탈퇴를 권고한 것. 리콴유 주지사는 어떻게든 연방에 남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쫓겨나다시피 연방을 탈퇴한 싱가포르에는 또 하나의 위기가 닥쳤다. 국내총생산(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던 영국군의 철수로 소득이 뚝 떨어졌다. 인구 증가율은 4.5%를 넘었다. 싱가포르는 곧 망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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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싱가포르가 어떻게 됐는지는 익히 아는 대로다. 예상과 정반대로 성장 가도를 달렸다. 민족 분규가 1969년 재발해 4명이 죽고 80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 이래 강력한 민족 화합정책과 경제성장에 따른 전반적 생활 수준 향상에 따라 민족 갈등도 자취를 감췄다.** ‘유교 사회주의 국가’, ‘보모 국가’라는 비판과 세계적 불경기 속에서도 싱가포르는 성장을 지속해 2015년 1인당 국민소득이 5만2,888만 달러(국제통화기금 통계 기준)에 이른다, 세계 6위, 아시아에서는 산유국인 카타르(7만6,576달러)에 이어 2위다.

싱가포르가 위기를 딛고 고도성장을 구가한 비결에는 소통의 노력이 깔려 있다. 아버지에 이어 싱가포르를 통치하는 리센룽 총리는 다섯 살 때부터 말레이어를 익히고 말레이시아 신문을 읽으며 자랐다. 리콴유는 자식들이 일반인과 섞여 사회의 실상을 보고 자라도록 총리 관저 바깥으로 내보내 길렀다, 리콴유의 부모들도 검소하게 생활하며 특권을 전혀 행사하지 않아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리콴유 자신 역시 돈이나 여성에 관련한 스캔들이 전혀 없었다.

싱가포르 공무원들도 비슷하다. 부패의 유혹에 휘말리지 않도록 세계 최고 수준의 공무원 봉급을 받는다고 알고 있지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떨어져 나온 직후, 리콴유는 재정 압박을 덜기 위해 공무원 급여부터 깎았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의 청렴도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출장비를 아껴서 개인 용도로 사용한 한 판사는 우리 돈으로 10만원 남짓한 ‘유용 금액’ 때문에 옷을 벗었다. 미화 20만 달러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았던 국토개발부 장관은 리콴유의 오랜 측근이었음에도 자살로 생을 마쳤다. 사업하기 쉬운 국가 1위, 국가경쟁력 2위, 부패 없는 국가 5위라는 성적표는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깨끗한데다 소수까지 감싸려는 권력이 없었다면 싱가포르는 분열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싱가포르의 성공에는 갈등극복의 역사가 숨쉰다. 위기는 기회일 수도 있다. 싱가포르가 위기를 극복한 키워드는 간단 명료하다. 도덕적이며 확고한 리더십, 청렴하고 유능한 공무원 집단, 국가 발전 장기 비전…. 우리들은 이런 가치를 갖고 있을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자니 닮기는커녕 정반대다. 군림과 훈계를 듣는 국민은 ‘개, 돼지’요, 부패의 악취가 진동하건만 반성은커녕 적반하장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영국의 직할식민지이던 싱가포르의 건국과 위기 극복, 경제발전은 리콴유 수상과 인민행동당(PAP:People‘s Action Party)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에 유학해 변호사 자격을 얻어 1950년 귀국한 리콴유가 인민행동당을 창당한 시기가 1954년. 초기 인민행동당은 당명이 말해주듯 좌익정당이었다. 구성원의 70%는 공산당 계열이던 인민행동당을 이끈 리콴유는 1959년 의회 선거에서 51석 가운데 43석을 석권하며 영국 자치령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에 올랐다. 공산당계열과 내분에 시달리던 리콴유 총리는 당면 과제로 말레이시아와의 통합을 추진했다. 서울 면적보다 약간 큰(꾸준한 간척사업을 통해 요즘은 훨씬 커졌다) 정도인 싱가포르 자체로는 도저히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싱가포르는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되고, 리콴유는 싱가포르주의 주지사를 맡았다. 싱가포르는 공업제품을 팔 내수시장으로 말레이시아를 원했지만 연방정부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연방 편입을 통한 경제 발전이 막힌 가운데 리콴유는 ‘정치적 실수’를 저질렀다. 1964년 초 말레이시아 연방 총선에 후보를 낸 것이다. 인종평등주의를 내건 인민행동당은 9명이 출마해 1석을 얻는데 그쳤다. 행동당의 참패였으나 말레이시아인들의 해석은 달랐다. 연방내 일개 주의 정당에 불과한 인민행동당이 연방 총선까지 관심을 가진 이상, 상권을 장악한 중국계의 정치력 급상승이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말레이시아인들은 이를 인종간 도전으로 여겼다. 말레이시아 극우파들은 인민행동당에 대한 말레이인들의 단결을 외쳤다. 1964년 싱가포르에서 발생한 말레이인들의 인종 폭동은 말레이시아 중앙 정치무대에 싱가포르를 기반으로 삼는 중국인들의 진출을 막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깔려 있었다.(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93년 출간 ‘아세아 연구 36권’ 유인선 동양사학과 교수의 연구논문 ‘싱가포르 150년사-어촌에서 독립국가로’에서 발췌)

** 2013년 12월 인도계 남성이 버스에 치여 숨지면서 400여명이 가담한 군중 소요가 일어나 경찰차가 불탔으나 사망자는 없고 18명이 부상 당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 소요는 민족 분규보다는 이주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이 원인이었다. 전통적인 중국계와 말레이계 간 분규가 사라진 대신 남아시아계 이주 노동자들이 싱가포르 사회의 새로운 갈등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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