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특파원 칼럼]미국 대통령들의 ‘인생 이모작’

최형욱 뉴욕특파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의 구원투수로 공개 등판한 시기는 지난해 9월이었다. 이른바 이메일 스캔들, 신뢰도 추락 등에 고전하던 힐러리 캠프는 임기 중 인기가 높던 전임 대통령의 지원 사격에 판세가 바뀔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남편의 르윈스키 성 추문만 다시 부각됐고 부부가 도매금으로 묶여 ‘정치 경력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은 구태 정치인’ 이미지만 더 굳어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기후변화 대처, 저개발국 지원 등 공익에도 기여했지만 돈 버는데 너무 열중하느라 재임 기간 쌓아 올린 평판을 상당 부분 까먹었다.

사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고향으로 돌아가 거의 은둔하던 퇴임 관행도 1990년대 이후 많이 바뀌었다. 조시 W 부시 전 대통령의 경우 고향 텍사스에서 화가로 변신해 전시회까지 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리더십ㆍ여성 교육, 도서관 건립 등의 사회 활동을 하고 있고 회고록, 강연 등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워싱턴이나 클린턴과도 다른 제3의 모델을 보여준, 어쩌면 우리 관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역대 미 대통령은 지미 카터다. 그는 직접 목수 연장을 들고 빈곤층을 위한 집 짓기, 분쟁 지역 중재, 인권 활동, 아프리카 질병 퇴치 등의 활동을 통해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임기 말 최악의 지지율로 처참하게 백악관을 떠났지만 지금은 클린턴보다 더 존경 받고 있다.


최근 20~30년 만에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퇴임 생활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 등 사망한 전설적 지도자들은 자의건 타의건 은둔하거나 취미 생활에 몰두했다. 하지만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전 총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 스페인 총리 등은 국제 문제 해결에 기여한다며 강연회, 컨설팅 등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돈벌이가 실제 목적이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는 사회적 인식 변화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고령화 여파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대다수 미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물러난 뒤 10년도 안 돼 죽음을 맞이한 탓에 회고록 쓰기도 시간이 빠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인처럼 인생 이모작이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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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가 5개월여 남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어떨까. 내년 1월이면 56세에 불과해 취미인 골프나 치며 유유자적하기에는 너무나 젊다.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 등에서 시민운동을 하겠다”는 본인 발언 외에 공개된 것은 거의 없지만 미 언론들은 클린턴과 카터의 중간 쯤으로 보고 있다. 오바마의 최대 목표는 시카고 남부 지역에 10억 달러를 들여 도서관, 박물관, 운동 시설 등을 갖춘 ‘오바마 대통령 센터’를 세우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 부의 축적보다는 센터 건설 비용 마련을 위해 클린턴처럼 회고록 출간, 강연회, 기금 유치 등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미 대통령의 퇴임 후 생활이 각각이지만 비슷한 점도 있다. 일단 재단이나 싱크탱크를 세워 임기 중 자신의 정책 노선을 옹호한다. 하지만 사회공헌이나 통합에 열중하더라도 현실 정치 발언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선이 달라도 현직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다반사다.

그렇다면 임기의 반환점을 돈 박근혜 대통령은 퇴임 후 어떤 모델을 그리고 있는 걸까. 한국도 재임 시절 실패했던 성공했건, 은퇴 후 자신의 국정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해 국민에 존경 받는 대통령을 가질 때가 된 것 같아 드는 궁금증이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검은 거래 의혹, 친박들의 총선 개입 녹취록 파문 등으로 가뜩이나 레임덕 위기에 빠진 판에 “은퇴 이후”를 운운하다니, 불경죄가 아니냐고.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연임 성공 직후부터 측근들과 준비 모임을 꾸려 퇴임 이후 구체적인 계획을 아직도 가다듬는 중이다.

/뉴욕=최형욱특파원 choihuk@sedaily.com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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