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정치와 타협·투기의 소산, 공공채무상환법



‘독립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벼?’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우리 얘기가 아니다. 독립 직후 미국의 사정이 딱 그랬다. 돈이 없었던 탓이다. 지출을 줄이려 해군을 아예 폐지했어도 남은 상비 병력인 육군 80여명에게 줄 급료조차 마땅치 않았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가운데 시간이 갈수록 빚만 늘어났다. 독립전쟁 당시 무분별하게 발행된 공채와 차용증서의 합계액은 1970년 연방의 재정 규모(160만 달러)보다 46배 이상 많았다.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의회가 요구한 첫 번째 정책도 채무 처리 방안이었다. 해결을 둘러싼 갑론을박 속에 해밀턴은 1790년 1월 ‘공공채무에 관한 첫 번째 보고서’라는 이름의 대안을 내놓았다. 골자는 두 가지. 연방정부와 주 정부가 지고 있는 정확한 부채 규모와 그 해결책을 담았다. 부채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의견이 분분하던 때에 해밀턴은 7,900만 달러라고 집계했다.


나중에 7,400만 달러로 수정집계된 부채 규모와 그 상환 책임 소재, 즉 연방정부가 3분의 2, 13개 주 정부가 3분의 1의 상환의무를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해결 방안. 해밀턴 재무장관이 대안으로 제시한 차환발행 계획은 온 나라를 찬반 논쟁에 빠트렸다. 대안의 내용이 그만큼 파격적이었고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해밀턴의 내놓은 대책은 크게 네 가지. 첫째 외국인 채권자의 원금과 이자 1,200만 달러를 전액 상환한다. 두 번째, 국내 채권자에 대해서는 재무부가 새로운 연방 채권을 발행해 원리금을 100% 갚는다. 세 번째, 주 정부의 모든 전쟁채무를 연방이 떠안는다. 네 번째, 새로 발행될 연방 채권의 이자율을 기존의 6%에서 4%로 내린다. 외국인들에게 전액 상환한다는 첫째 안에 대해서는 반대가 거의 없었다. 대외 신뢰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방안은 벌집을 쑤신 듯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해밀턴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던 제임스 메디슨(훗날 미국 4대 대통령)마저 두 번째 방안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메디슨은 대륙회의가 발행한 독립전쟁 채권을 애국심으로 인수했던 소액 투자자들과 나중에 헐값으로 인수한 투기꾼과 구분해야 한다는 ‘차별 논리’를 내세웠다. 메디슨의 주장은 국민들의 열띤 환영을 받았다.

애국심과 애향심으로 독립전쟁 채권을 주로 매입한 농민들 가운데 끝까지 보유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생활고를 못 이겨 독립전쟁 채권을 액면가의 25%에 넘긴 사람들도 많았다. 헐값에 독립채권을 사들였던 동북부 투기세력에 대한 특혜라는 지적은 두고두고 해밀턴의 발목을 잡았다. 독립전쟁에 기여한 게 없는 투기꾼들의 배만 불린다는 지적에는 매디슨처럼 정파에 관계없이 한 목소리를 냈다.

해밀턴은 이를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차별화 방안에 따르려면 독립채권 유통과정, 즉 매매의 전 과정을 모두 파악해야 하는 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폈다. ‘법치’도 내세웠다. ‘채권의 원리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계약 위반이다. 신생 미국 연방이 법치의 기본원리를 위배한다면 국내외 신용을 쌓을 수 없다’며 무차별적 전액 상환 방안을 밀고 나갔다.


세 번째 방안, 즉 연방이 주 정부의 부채를 대신 갚겠다는 방안에 대해서는 주별로 명암이 엇갈렸다. 작고 약한 주는 호응한 반면 버지니아주처럼 상대적으로 재정 규모와 상태가 크고 좋은 주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연방의 힘이 주보다 강해질 수 있다고 의심한 것이다. 연방 채권의 이자율을 6%에서 4%로 내린다는 네 번째 방안도 연방 정부의 재정 상태와 미국의 국제적 신인도를 감안할 때 ‘비현실적인 몽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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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어땠을까. 네 번째 사안부터 풀어보자. 미국의 경제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성장한 덕에 연방정부는 연 4%의 이자를 지급하고도 얼마든지 국내외 자금을 끌어쓸 수 있게 됐다. 1790년 160만 달러에 불과했던 연방의 조세 수입은 1791년 260만 달러를 거쳐 1794년 540만 달러, 1800년에는 1,080만 달러로 늘어났다.

논란이 컸던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안, 즉 무차별적 액면 지급과 주 정부 채무의 연방 인수 방안을 놓고 해밀턴과 의회는 반년 가까이 싸웠다. 1790년 4월 의회 표결에서는 32대 29로 부결됐다. 해밀턴의 방안이 물거품으로 끝날 것 같던 순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해밀턴과 친구인 메디슨, 그리고 반대파의 리더격인 토마스 제퍼슨 국무장관(훗날 미국 3대 대통령)은 7월의 어느 날 저녁 식사에서 서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았다.

먼저 해밀턴은 연방의 수도를 임시 수도인 뉴욕에서 앞으로 10년간 필라델피아로 이전한다는 데 양보했다(얼마 뒤 새로운 수도를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사이의 포토맥 강변에 짓기로 합의 내용이 바뀌었다. 당시의 합의에 따른 미국의 수도가 오늘날 워싱턴 특별구역이다). 해밀턴 등 연방주의자들이 많은 뉴욕은 수도로서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던 주권주의자들의 리더 제퍼슨은 남부에 가까운 지역으로 연방수도를 옮겨오는 데 성공했다. 대신 해밀턴의 제안을 들어줬다.

미국사에서 ‘1790년의 대타협(the Great Compromise of 1790)’으로 기억되는 정치적 거래의 결과, 해밀턴의 대안이 담긴 ‘공공채무 상환법’은 다시금 의회 표결로 넘어갔다. 1790년 6월26일, 표를 세어보니 숫자가 4월과 같았다. 29표 대 32표. 그런데 찬성과 반대가 바뀌었다. 29대 32로 부결된 사안이 재투표에서 32대 29로 통과된 것이다. ‘공공채무 상환법’은 해밀턴의 기대대로 신생 미국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연방정부의 지도력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월스트리트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차환발행을 통해 75%라는 차익을 거둔 ‘투기자금’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공공채무상환법이 통과된 이면에는 맨해튼과 필라델피아 거래소 등에서 증권을 사고 팔던 큰 손들의 힘도 작용했다. 미국의 경영사가 토머스 K. 맥크로 하바드 경영대학원 교수(2012년 작고)는 ‘미국 금융의 탄생(The Founders and Finance·이경식 옮김)’에서 이들 투기꾼들이 ‘해밀턴의 강력한 지지자이며 친구’라고 썼다.

맥크로 교수는 해밀턴이 주 정부의 채무를 연방정부가 떠안자고 주장한 배경에도 미국의 부호들을 주 정부보다 연방정부의 영향권에 두려는 포석이 있었다고 봤다. 금융의 큰 손들은 공공채무 상환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부터 조직화하기 시작해 1792년 봄에는 월가 뒷골목의 한 나무 밑에 모여 ‘버튼우드 협약(Buttonwood Agreement)’을 맺고 뉴욕 증시의 초석을 깔았다.

공공채무 상환법에는 미국 건국 초기 정치와 경제 뿐 아니라 월가의 탄생마저 담겨 있는 셈이다. 다만 당시 법을 둘러싼 대립과 앙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끝내는 1861년 남북전쟁으로 번지고야 말았다. 약 4만 여 단어에 이르는 해밀턴의 공공채무보고서는 그의 또 다른 저작 ‘연방주의자 논고(The Federalist Papers: 제임스 메디슨·존 제이·해밀턴 3인의 익명 공저)와 함께 18세기 후반 미국 영어를 연구하는 자료로도 쓰인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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