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운전면허 적성검사장 가보니]54초만에…"끝났습니다" 합격도장 '쾅'

허술한 발급·갱신 체계에

심신미약자 걸러지지 않아

'뇌전증 교통참극 원인' 잇단 지적

"병원-경찰 협업 시스템 구축 등

신체·심리질환 관리 강화해야"

지난 2일 서울 강남운전면허시험장 신체검사실에서 시민들이 적성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사진=박우인기자지난 2일 서울 강남운전면허시험장 신체검사실에서 시민들이 적성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사진=박우인기자


“다 끝났습니다. 신체검사서 접수창구에 주면 돼요.”

3일 오전 서울 강남구의 한 운전면허시험장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적성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검사실이 있는 지하 1층부터 1층의 접수처까지 이어졌다. 기자가 직접 참여한 적성검사의 경우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걸린 시간은 54초였다. 적성검사를 하러 온 사람들 대부분은 대기시간이 30분 이상이었고 실제 검사에 소요된 시간은 1분 안팎이었다.


검사실에 들어선 사람들은 양쪽 눈을 번갈아 가린 후 검사관의 지휘봉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나비, 비행기, 숫자 1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신체검사서에는 ‘합격’ 도장이 찍혔다.

지난달 31일 부산에서 뇌전증(간질) 환자인 김모(53)씨가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낸 후 운전면허 발급·갱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문제점들도 제기되고 있다. 운전면허를 받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인 적성검사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허술한 운전면허 관리’ ‘날림 적성검사’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김씨 사고 이후 많은 운전자가 “면허 취득·갱신 과정에서 심신미약자들이 걸러지지 않아 도로 곳곳에 시한폭탄이 있다”며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다. 17명의 사상자를 낸 김씨의 교통사고 역시 허술한 운전면허 관리 체계가 빚은 참극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뇌전증 환자는 도로교통법상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없다. 이와 관련, 김씨의 교통사고 사건을 맡은 부산 해운대경찰서는 2일 “지난 1993년 운전면허를 취득한 김씨가 지난해 9월에 울산의 한 병원에서 뇌전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어왔다”고 밝혔다. 경찰은 뇌전증 환자인 김씨가 지난달 운전면허 갱신을 위한 적성검사를 통과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올 6월에도 대전 대덕구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 281㎞ 지점(부산 기점)에서 정신질환 증세가 있는 김모(35)씨가 자신의 코란도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차선을 변경해 옆차선에 있던 카니발 승합차를 들이받고 도주했다.

지난 2일 서울 강남운전면허시험장 접수창구에서 시민들이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기 위해 건강검진 내역을 조회하고 있다. /사진=박우인기자지난 2일 서울 강남운전면허시험장 접수창구에서 시민들이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기 위해 건강검진 내역을 조회하고 있다. /사진=박우인기자


심신미약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가 연이어 일어나자 전문가들 사이에서 운전자의 신체·심리질환을 관리하는 가이드라인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 제도에서는 안전운전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면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로 분류해 관리한다. 6개월 이상 정신질환으로 치료한 적이 있거나 도로교통법 시행령에 따라 병무청과 국민연금 등의 기관에서 시력장애와 약물중독 등을 기준으로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검사 대상자를 선정한다.


전문가들은 운전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영향을 미치는 질환들이 다양한 만큼 수시 적성검사 대상 질환을 확대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저혈당 쇼크로 의식을 잃을 수 있는 당뇨병, 갑자기 졸음 상태에 빠지는 기면증, 심장질환 등도 운전 중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지만 현 제도에서는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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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석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경찰과 의사 등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안전운전에 위협이 되는 질환군을 관리하는 체계적인 프로세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과 병원 간의 협업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현재 병력은 개인정보에 해당하기 때문에 병원이 환자의 상태를 경찰에 통보할 의무가 없고 또 현행 의료법은 환자 정보를 환자의 동의 없이 공개한 병원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환자가 자신의 병력을 스스로 알리지 않는 한 경찰은 운전면허시험 응시자의 심신상태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는 셈이다.

김 수석연구원은 “미국 등 선진국들은 면허 관리기관과 의료기관 간의 협업 시스템을 구축해 심신미약자 등을 관리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면허 관리기관과 의료기관 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뇌전증 장애등급 판정자와 노인장기요양보험 수급자까지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병원 입장에서 환자의 정보를 외부기관에 넘기면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일단은 경찰 차원에서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를 확대하는 방안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우인·이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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