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독립협회의 주권 수호 운동은 제정러시아·일본 등 주변 열강의 세력 균형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조선에 개화독립 사상을 다질 시간을 벌어줬습니다. 이는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현재 요동치는 한반도 주변 정세를 한국에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신용하(79·사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경기 성남 소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린 ‘독립협회 12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독립협회는 1896년 아관파천 후 열강의 한반도 침탈에 맞서 서재필·이상재·윤치호·안경수·남궁억 등 재야 개화파들이 그해 7월2일 독립과 자강을 기치로 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사회단체다. 신 명예교수는 가장 권위 있는 독립협회 연구 서적으로 꼽히는 ‘독립협회연구(1976)’를 내놓는 등 이 분야의 석학으로 평가받는다.
신 교수는 “독립협회가 독립신문 발간과 시민 계몽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저지한 자주독립의 보루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광산 채굴권 등 많은 이권을 챙긴 러시아가 부산 절영도(현재 영도) 조차까지 요구하자 독립협회는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대회인 만민공동회를 두 차례 열어 이를 격렬히 규탄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7만명선이었는데 만민공동회에 1만명 이상의 성인 남자가 참가했다.
대규모 민중대회에 충격을 받은 러시아는 조차 요구를 거둬들이고 중국 요동반도로 해군기지를 철수했다. 힘의 공백 상태가 된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은 1898년 조선 내정간섭을 불허하는 ‘로젠-니시협정’을 맺었다. 신 교수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만 6년간 한반도는 열강의 세력 균형이 유지됐다”고 설명했다.
열강의 침략을 막는 동시에 조선을 근대적 입헌군주국가로 건설하는 계획을 세운 독립협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 설립법인 ‘중추원신관제’를 고종의 재가를 얻어 공표까지 했지만 당시 정권을 잡은 친러 수구파의 모략으로 1898년 11월 강제 해산됐다.
신 교수는 “만약 개혁파 정부가 수립되고 의회만 개설했더라도 1905년 국권 피탈의 비극을 피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을사늑약을 강요한 일제는 조선이 군주전제국(君主專制國)인 만큼 황제의 승인만 있으면 체결이 가능하다고 황제와 대신을 협박했다. 을사늑약이 의회에 상정되면 이를 막을 수 있음을 깨달은 고종은 윤치호를 황급히 불러 의회 설립을 종용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신 교수는 “고종이 의회 설립 운동을 탄압한 것을 절절히 후회했다고 전해진다”며 “을사늑약이 불가항력이었다고 일부 역사학자들이 평가하지만 의회 설립처럼 필연을 바꿀 기회는 있었다”고 강조했다.
다수의 일본 학자가 조선에 동학혁명처럼 강렬한 저항민족주의는 있었지만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할 근대화·자유민권 운동이 없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왜곡하는 것에 대해 신 교수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은 이미 19세기 말 우리 스스로 변혁운동을 전개하고 근대 시민사회로 발전시킬 구체적 방안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독립협회 내 공화국을 추구한 소장파에 의해 신민회가 결성되고 이를 계승한 임시정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건국한 만큼 독립협회가 대한민국의 초석인 셈”이라며 “독립협회의 자주독립 민족운동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교훈을 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