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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오 3연패]압박감·자신과의 싸움 이겨낸 '강심장 승부사' 진종오

대기록 도전 상황에도 시종 집중력 유지

대표팀 코치 "만족 모르는 승부욕 남달라"

늦은 입문·부상·슬럼프 이겨내고 위업 달성

진종오(37·KT)는 마지막 열 번째 발을 쏜 뒤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상상불가의 압박감,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만족감에 비로소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11일(이하 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사격센터에서 열린 2016리우올림픽 사격 남자 50m 권총 경기는 진종오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사수임을 입증한 무대였다.

사격은 양궁이나 골프와 닮았다. 다른 종목과 달리 요행이나 상대의 범실을 기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다. 기술뿐 아니라 기술을 넘어서는 자신의 멘털(심리) 컨트롤이 승부를 좌우한다.


진종오의 강점이 여기에 있다. 전대미문의 대기록 도전에 나선 선수답지 않게 시종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미 14년간의 국가대표 경력 동안 잘 알려진 ‘강심장 승부사’의 면모였다. 차영철(57·KT) 사격 국가대표팀 코치는 “(진종오는) 승부욕을 타고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그만큼 이룬 게 많으면 보통 자기도 모르게 ‘이 정도면 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종오는 다르다. 그의 승부욕은 만족할 줄을 모르더라”고 설명했다. 지난 7일 공기권총 10m에서 5위에 그쳐 부담감이 곱절이 된 상황이었기에 그의 집중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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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사격 역사상 전인미답의 위업을 이룬 최고 총잡이 진종오는 한국 사격의 최고 스타다. 2002부산아시안게임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한 그는 2004아테네올림픽 50m 권총에서 ‘깜짝 은메달’로 주목을 받았고 2008베이징대회에서 50m 권총 금메달과 10m 공기권총 은메달로 한국 사격에 16년 만의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다. 이어 세 번째 올림픽 무대인 2012런던대회에서 공기권총 금메달까지 명중하며 ‘사격 황제’의 금관을 썼다.

사격 입문은 강원사대부속고 1학년 때로 많이 늦었다. 부친의 지인이 장난감 총을 좋아하고 총 모형 조립을 즐기던 모습을 눈여겨보고 권유한 게 계기가 됐다. 고교시절 교통사고를 당한 데 이어 대학 때 운동을 하다 어깨를 다쳐 수술을 받는 등 부침을 겪었던 진종오는 경남대 재학 중이던 1999년 문화부장관기 학생사격대회 10m 공기권총에서 2관왕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다. 처음 태극마크를 단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10m 공기권총 개인전 동메달, 50m 권총 단체전 은메달을 목에 걸면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첫 올림픽인 2004아테네대회에서는 50m 권총 결선에서 1위를 달리다 7발째 6.9점을 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다 잡았던 금 대신 은메달을 땄지만 세계 사격의 중심에 서는 첫 단추가 됐다.

그로부터 4년 뒤 진종오는 당연한 듯 베이징대회에서 50m 권총 금메달과 10m 공기권총 은메달을 수확하며 세계 정상에 섰다. 이후의 수확은 이루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2009년 월드컵 시리즈와 월드컵 파이널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승행진을 이었고 2010년 뮌헨 세계선수권대회 권총 50m 단체전 금메달, 같은 해 광저우아시안게임 공기권총과 50m 권총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세 번째로 밟은 2012런던올림픽 무대에서는 두 번째 50m 권총 금메달과 함께 두 차례 은메달에 그쳤던 공기권총 정상도 정복했다. 2013년 여름 이혼한 뒤 2014인천아시안게임에서 노메달에 그치는 등 잠시 슬럼프를 겪기도 했으나 하루 200발의 총을 쏘는 강훈련에 매진하며 다시 일어섰다. 최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다”며 “그동안 국가대표 선발전과 국내외 대회를 치르며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다”고 털어놓았던 그지만 강심장의 진종오는 꼭 필요할 때 다시 한번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리우데자네이루=양준호기자 mguel@sedaily.com

박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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