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행책이 차고 넘친다. 보고 먹고 체험하는 관광지를 알려주는 가이드북이든, 감상을 적은 여행기든, 그것도 아니면 여행을 주제로 한 산문집이든 이미 세상에는 많고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책 ‘세상의 용도’는 특별하다. 60년도 더 지난 오래된 내용이라서가 아니다. ‘세상의 용도’는 1953년 6월부터 1954년까지 스위스 국적의 두 청년이 유고슬라비아, 터키, 이란,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까지 다녀온 여행기다. 동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거친 것이다. 한 사람은 이 책을 쓴 작가 니콜라 부비에고 또 다른 사람은 삽화를 그린 화가 티에리 베르네다. 부비에는 당시 25~26세, 베르네는 27~28세였다. 한창 때인 그들은 피아트 토폴리노 승용차를 타고 여행했다.
책은 유럽 여행기의 고전으로 꼽힌다. 단순한 안내문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삶의 교과서이자 지혜의 책으로 평가된다. 저자와 그의 동료는 스쳐 지나가는 관찰자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여행했다. 혹독한 기후는 물론, 이란에서는 정치적 분쟁에 말려들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다. 돈을 벌기 위해 작가는 글을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려 전시를 했다. 어떤 때는 식당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행의 참뜻을 알아간다. “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여행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는 여행이 여행자를 만들고 여행자를 해체한다.”(15p) “일상적인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습성을 박탈당한 여행자는 마치 포장지가 벗겨지듯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는 크기로 줄어든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좀 더 왕성한 호기심과 날카로운 직관을 발휘하게 되고 첫인상을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119p)
“여행을 하면서도 자기 본래의 모습을 조금도 내던지려 하지 않겠다는 게 정말 얼마나 터무니없는 계획인가. 원래의 어리석은 자로 그대로 남아있겠다니. 내가 아는 한 마치 샤일록처럼, 여행자에게 ‘살덩어리를 떼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었다.”(645p)
책은 덤으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등 국내 독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의 역사와 풍습을 자세히 알려준다. 유럽인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중립 국가인 스위스인의 시각에서 미국·영국·소련 등의 제국주의가 이들 지역에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지난 1963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절판을 거듭하다가 1985년과 2014년에 수정판이 나왔다. 저자인 니콜라 부비에는 1998년, 베르네는 1993년 각각 사망했다. 생전에 부비에는 실론(스리랑카) 여행을 통해 ‘물고기-전갈’을, 일본에서 ‘일본 연대기’를 완성했고 이후 한국도 방문했다. 2004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1,560쪽에 달하는 그의 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프랑스 생말로북페어는 ‘감탄할 만한 여행자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1991년 행사에서 그의 여행기에 대한 특집전을 마련했고 2007년부터는 뛰어난 여행작가에서 수여하는 ‘니콜라 부비에상’을 제정해 지금까지 시상하고 있다.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