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위기 이후 대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을 반추해보면 일관된 흐름을 하나 찾을 수 있다. 세련된 말로 하면 ‘가지치기’요, 조금은 투박한 표현을 빌리면 ‘고사(枯死) 작전’이다. 시장의 충격을 우려하는 금융 관료들이 이런 식의 구조조정을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했다. 대우가 그랬고 120여개 워크아웃 기업 역시 이 방식이 적용됐다. 환란의 위기를 빨리 벗어난 것은 다행이지만 이 속에서 우리는 아까운 기업을 많이 잃었다. 이 중에는 힘들더라도 살렸더라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컸을 곳이 상당하다. 대우자동차는 제너럴모터스(GM)에 팔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현대차에 버금갈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삼성이 계속 자동차 사업을 영위했더라면 스마트카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을까.
모든 상황에 ‘가정법’을 들이대면 끝이 없지만 그래도 이들 기업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 제조업의 생사 판단을 금융공학적 관점에서 의존하고, 금융 관료들이 실물 산업에 대한 표피적인 지식을 갖고 구조조정을 주도한 대가는 이렇게 컸다.
1년 넘게 진행 중인 구조조정의 흐름은 이런 측면에서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두 산업을 잃느냐, 지키느냐는 기로에 있다. 바로 조선과 해운이다.
불행하게도 흘러가는 모양을 보면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당장 대우조선은 혈세 투입에 따른 책임자 찾기 작업이 몇 달째 진행 중이다. 화살은 어느덧 정성립 현 사장에까지 다가왔다. 소난골 사태를 해결하기도 벅찬 정 사장은 검찰 수사의 칼날 속에서 한숨을 쉬고 있다. 대우조선은 언제라도 유동성 문제에 다시 봉착할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롭다.
국민들이 혈세 투입을 언제까지 인내할지 모를 일이다. 인내가 끝나는 순간 대우조선은 생명을 다하고 조선 산업의 중심은 중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해운은 조선 이상으로 위험하다. 단언할 수 없지만 현대그룹이 잘못된 구조조정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혹자는 현 회장의 경영 능력을 의심하지만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데는 어정쩡한 구조조정의 잣대를 들이댄 당국과 채권단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증권과 상선을 품에서 떠나보낸 현대그룹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상 고사당해 홀로 남은 ‘마른나무’일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대증권이 일본의 사모펀드로 넘어가지 않고 KB로 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과감하고 신속하게 구조조정이 이뤄졌더라면 현대상선은 지금쯤 글로벌 치킨게임 속에서 승자가 됐을 수 있다. 현대그룹 역시 훨씬 좋은 모양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한진해운은 어떤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자구안을 내기 직전인 지난 24일 밤늦은 시간 임원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5,000억원의 자구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나름 꺼낼 것은 다 내놓았다고 그룹 관계자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채권단은 당장이라도 법정관리에 넣을 태세다.
일부 사람들은 법정관리에 들어가도 청산형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현대상선과 합쳐 생존의 길을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해운 산업에 밝은 사람들은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공급이 부족할 때야 그런 논리가 통하지만, 지금처럼 물동량이 줄고 해운사가 넘쳐나는 시기에는 그런 방정식이 통할 수 없다. 우리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소중한 자산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한진해운은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한진의 계열사들이 더 나서기는 쉽지 않다. 배임의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하다. 결국 조 회장이 결자해지하는 수밖에 없다. 유동성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도 채권단이 나설 ‘명분’을 줄 필요가 있다. 채권단 역시 자구안의 숫자에 함몰되기보다 조 회장 측이 조금이라도 더 꺼낸다면 대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채권단도 살고, 조 회장도 살고, 나라의 알토란 같은 자산도 지켜낼 수 있다./yo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