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약소국의 벼랑끝 전술, 대구 전쟁





1958년과 1972년, 그리고 1976년. 아이슬란드가 영국과 세 차례 대구 전쟁(Cod War)을 치른 년도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쟁이라기 보다 어업분쟁이었지만 아이슬란드는 생사를 걸었다. 분쟁의 양상도 치열했다. 실탄 사격과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영국 해군은 대규모 함대를 아이슬란드 해역에 깔았다. 세 차례 전쟁의 결과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아이슬란드의 3전 3승. 냉전 덕분에 아이슬란드는 영국과 싸움에서 이기고 연안 어장을 지켜냈다.


오늘날에도 군대라야 고작 400여명. 가장 강력한 무기가 덴마크에게 선물 받은 스웨덴제 40㎜ 기관포 3문(1936년 제작분)인 아이슬란드는 왜 영국과 일전불사를 외쳤을까. 돈 때문이다. 국가 수입의 95%를 어업에 의존하던 아이슬란드는 1954년부터 경기침체에 빠진 터에 대구와 청어의 어획고까지 급감하자 특단의 카드를 꺼냈다. 육지로부터 4해리(약7.4㎞)까지인 배타적 어업전관수역을 1958년9월1일 자정부터 12해리(약 22.2㎞)로 확대한 것.

아이슬란드 연안에서 조업하던 덴마크와 노르웨이·네덜란드·서독 어선들은 바로 떠났다. 그러나 버티는 나라가 있었다. 영국은 어선단 퇴거 시한을 넘기고 어선 보호를 명분으로 53척의 함대까지 보냈다. 한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던 영국 해군에 맞서던 아이슬란드 연안경비대의 전력은 순시정 6척에 병력 100명. 양측의 불균형한 대치가 이어지던 10월 초, 아이슬란드 순시정이 정선명령에 불응하는 영국 트롤 어선에 기관포를 쐈다.

아이슬란드의 발포는 마치 신호탄처럼 인근에 대기하던 영국 구축함들을 불러들였다. 아이슬란드 순시정들은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양측의 분규는 국제 해양법 회의의 표결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우리 영해 문제를 왜 외국이 논의하는가”라고 반발하던 아이슬란드는 영국의 지속적인 압박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아이슬란드의 승리. 미국이 소련을 감시·견제할 전략 요충지인 아이슬란드의 편을 들어준 덕분이다.

아이슬란드는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15세기 초부터 시작된 영국 어선단과의 여덟 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분쟁에서 번번이 양보한 끝에 처음 맛보는 승리의 기쁨이 컸다. 하지만 기쁨은 순간으로 끝났다. 어렵게 확보한 12해리 어업전관수역에서도 1960년대 중반부터 어획량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1961년 11만t을 건져 올렸던 대구는 1971년에는 4만4,500t으로 급감했다. 청어잡이는 타격이 더욱 컸다. 같은 기간 중 76만t에서 6만t으로 줄었다.

어획량 감소에 전전긍긍하던 아이슬란드는 어업전관수역 확대 14주년을 맞은 1972년9월1일, 50해리까지 늘린다고 선언했다. 2차 대구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슬란드는 선진어업국가들의 남획으로 생존권이 위협 받는다며 50해리 안에 들어오는 외국 어선은 무조건 나포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인근 해역에서 조업하던 영국과 서독, 프랑스, 벨기에 어선단은 철수를 거부하고 어로작업을 계속했다.

아이슬란드는 개별 협상에 나서며 “우리는 어업 수출액이 전체의 90%인데 비해, 다른 나라들이 아이슬란드 인근에서 잡은 어획량의 수출 비중은 0.2%에 불과하다”며 설득에 나섰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영국과 서독은 버텼다. 아이슬란드 해안경비대는 고속정과 갈고리, 커터를 이용해 외국 트롤 어선의 그물을 끊으며 조업을 방해했다. 사망자도 나왔으나 영국과 서독도 이번에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영국의 제소로 이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됐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아이슬란드의 패소를 예상했다. 1차 대구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아이슬란드의 요구를 받아들이되 어느 쪽이든 합의각서 내용을 깨면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영국과 서독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며 각국의 어획량 할당까지 정해줬다.


아이슬란드는 여기에 불복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단속 작업을 계속하자 서독 마저 어업지도선을 분쟁 수역에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라는 낙인을 안고 있는 서독까지 적극적으로 나오자 아이슬란드는 비장의 패를 꺼냈다. ‘영국과 서독 어선단이 철수하지 않으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탈퇴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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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군대도 없는 회원국’이지만 아이슬란드는 중요한 나라였다.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을 든다면 북해와 대서양으로 진입하는 소련의 함대와 폭격기를 요격할 1차 방어선이 없어질 수도 있었다. 마침 소련 함대는 잠수함 10척을 포함한 20척의 함정을 아이슬란드 해역에 보내고 폭격기 편대까지 띄웠다. 아이슬란드 북서부에 세계 최북단의 공군기지를 건설해 운용하던 미국은 몸이 달았다.

미국 언론들이 ‘국제적인 조율까지 거부하려는 아이슬란드의 태도는 법적·도덕적으로 근거가 희박하다’는 보도를 잇따라 내보내는 와중에서도 미국 정부는 영국과 서독에게 대승적 차원의 양보를 채근했다. 영국과 서독은 1973년 10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이슬란드의 50해리 어업전관수역에서 철수하고 국제사법재판소가 정한 어획 쿼터량도 줄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2차 대구 전쟁도 아이슬란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아이슬란드는 불과 2년 뒤인 1975년 11월 다시금 어업전관수역을 200해리로 넓힌다고 발표했다. 약속 위반이었으나 이번에는 세계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각국이 저마다 ‘배타적 경제수역 200해리’를 주장하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다. 마침 제4차중동전(1973년10월)을 계기로 아랍국가들이 석유 무기화로 세계 경제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직후였다. 자원민족주의와 함께 자국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 확대 바람이 불면서 아이슬란드도 끼어들었다.

영국은 3차 대구전쟁에서도 크게 분노하며 대규모 어선단을 보냈다. 아이슬란드 순시정을 만난 영국 어선단은 정선 명령에 불응하고 오히려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어선에 기관포를 쏘는 상황에서 영국 구축함이 달려왔다. 덩치가 큰 구축함은 아이슬란드 순시정에 돌진해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순시정이 반침몰 상태에서 겨우 항구로 돌아오는 광경은 아이슬란드 국민들을 들끓게 만들었다.

대학생들이 영국 대사관을 습격해 돌을 던졌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나토를 탈퇴하겠다는 으름장도 되풀이하고 소련제 구축함을 구매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아이슬란드는 미국에게도 전투함 판매 요청을 보냈다.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이용하면서 대영 강경책을 펼치는 아이슬란드의 벼랑 끝 전술에 미국은 또 다시 중재에 나섰다. 영국에서 아이슬란드 해역내 쿼터량 논쟁이 한창일 때 아이슬란드 해역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아이슬란드 순시선은 영국 어선에 총격을 가하고 영국 구축함은 아이슬란드 순시선을 들이받는 작전 속에서 양측의 감정은 극도로 나빠졌다. 1976년 2월 아이슬란드는 영국에게 외교관계 단절까지 선언했다. 일촉즉발 분위기와 압도적인 전력 차이 속에서도 아이슬란드에게는 또 다른 빛줄기가 찾아들었다. 캐나다와 멕시코, 소련 등 긴 해안선을 가진 국가들의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추진이 아이슬란드를 도왔다.

나토의 결속을 위해 영국이 양보해야 한다는 미국의 재촉과 자원민족주의, 경제수역에 대한 국제적 흐름을 타고 아이슬란드는 3차 대구전쟁에서도 승리를 따냈다. 세 차례의 대구전쟁을 통해 아이슬란드도 교훈을 얻었다. 어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구조로는 국가의 지속 발전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관광과 금융, 정보통신 산업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덕분에 최근 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대구 어획량이 반세기 전과 비교해 20%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변화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두 배 이상의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아이슬란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 차례 대구전쟁에서 승리한 아이슬란드는 우리에게 전쟁과 분쟁은 군사력으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겉으로는 벼랑 끝 전술로 보였어도 아이슬란드는 고도의 지능 플레이를 펼쳤다. 냉전과 지정학적 위치를 제대로 활용하고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외교력이야말로 아이슬란드가 승리한 진짜 비결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지 지난 2006년 폐쇄됐던 이이슬란드의 미군 공군기지가 다시 가동될 예정이다. 세 차례 대구전쟁의 고비마다 결정적인 도움을 줬던 미국의 군대를 자신들의 필요와 시대 흐름에 따라 내보내고 부를 수 있는 전략적 유연함이 참으로 부럽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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