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불타는 애틀랜타…남부의 증오





사망 135만, 부상 150만. 독립전쟁에 나선 이래 대테러작전까지 미군 사망과 부상자 숫자다. 가장 많은 병력이 참전한 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미군 1,650만명이 유럽과 태평양에서 독일, 일본과 싸웠다. 그럼 인명 피해가 제일 컸던 전쟁은 무엇일까. 두 차례의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 있다. 남북전쟁. 사망자 누계의 56%인 75만명이 남북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북부와 남부는 그만큼 치열하게 내전을 치렀다.


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의 원한은 깊고도 깊다. 주로 이 사람 탓이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장군. 1864년 5월부터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 그는 가는 곳 마다 악명을 떨쳤다. 전략 요충지인 애틀랜타에 도달하기까지 크고 작은 16차례 전투에서 셔먼의 군대는 두 가지 목표 아래 움직였다. 하나는 전투. 다른 하나는 파괴였다. 전투에서 대부분 백중세를 기록했던 셔먼은 파괴전에서는 밀알 한톨 남기지 않고 짓밟고 불지르고 때려 부쉈다.

미국 여류작가 마거릿 미첼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파괴전 양상이 고스란히 담긴 장면이 나온다. 영화 포스터의 배경으로도 등장하는 ‘불타는 애틀랜타’ 장면이다. 포격과 방화, 약탈이 진행되는 가운데 거대한 불길이 목조 건물들을 집어 삼키는 와중에 마차 한대가 간신히 불바다를 탈출하는 장면은 마거릿 미첼 여사가 그려낸 허구가 아니다. 여주인공 스칼릿 오하라로 분장한 비비언 리가 애틀랜타를 탈출하는 이 장면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공격하는 북군의 포격과 철수하는 남군의 물자 소각으로 폐허로 변하는 애틀랜타의 참상이 영상에 녹아 있다.


남군이 도시를 빠져나간 다음날인 1864년9월2일, 셔먼 소장이 이끄는 북군이 애틀랜타에 들어왔다. 셔먼의 군대는 애틀랜타에서도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다. 철도에서 목장, 면화밭, 대형 건물에 이르기까지 남부의 전쟁수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파괴하고 불태웠다. 셔먼의 군대는 철도 역사를 부수고 철로를 폭파한 것도 모자라 나중이라도 남군이 재활용할 소지를 없애겠다며 철로를 나무에 걸고 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남부인들은 이를 ‘셔먼의 넥타이(sherman‘s neckties)’라고 부르며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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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먼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는 잿더미로 변했다. 두 갑자(1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1990년대에야 가까스로 복구가 완료됐을 정도다. 남부의 증오가 얼마나 깊었는지,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대동강에서 불탔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애틀랜타에서는 ‘원수를 대신 갚았다’는 말이 돌았다. 2차대전 중에는 남부 출신 기갑병이 셔먼의 이름을 딴 M-4셔먼 전차의 탑승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셔먼이 초토화하며 애틀랜타 점령은 미국의 역사를 바꿨다. 지지부진한 전황 때문에 재선 여부가 불투명했던 북부 연방의 대선에서 링컨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고 남부와의 휴전 논의가 사라졌다. 세계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후 미군 총사령관에 지명돼 미국 최초의 4성 장군 계급까지 받은 셔먼은 자신의 이론을 전략의 기본으로 삼았다. 셔먼의 병법은 21세기의 미군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차별 포격과 초토화를 통한 충격과 공포.’

‘적의 전쟁 수행 능력을 끊는다’는 전략 아래 파괴와 초토화 작전을 구사했던 셔먼은 전쟁사에서도 현대전의 모범을 세운 군인으로 기억된다. 너무나 잔혹한 방법을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셔먼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전쟁의 영광이란 헛소리다. 전쟁은 지옥이다. 그리고 잔학행위다. 그렇다고 잔학행위를 바꿀 필요는 없다. 잔인하면 할수록 빨리 끝나니까.” 오늘날 세상에는 셔먼의 후예들과 전략 전술이 판친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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