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 개시를 한 달만 뒤로 미뤘어도….”
한진해운의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여파가 글로벌 물류대란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와 금융당국이 한진해운에서 손을 뗄 시기마저 잘못 고른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최대 소비 성수기인 ‘블랙프라이데이(11월 마지막 주 금요일)’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사상 초유의 물류 혼란이 빚어져 자칫 매출 6,300억달러(약 697조원)에 이르는 연말 쇼핑 대목을 놓칠 가능성이 커진 탓이다.
더욱이 준비 없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해외에서 국내로 화물을 들여오는 화주(貨主)들이 벌써부터 외국계 해운사와 발 빠르게 접촉해 한진해운 물량을 이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운업 포기를 선언한 정부가 시간마저 벌어주지 못해 수십억달러 규모의 무형자산인 한진해운 영업망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을 비롯한 주요 수출업체들은 미국 블랙프라이데이에 맞춰 이달 중 주력 상품을 미국행 컨테이너선에 선적할 예정이었다.
삼성전자 광주공장과 LG전자 창원공장에서 생산되는 냉장고 등 가전제품이 주력 상품이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삼성과 LG가 가전시장에서 선보인 프리미엄 라인이 북미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 매출 확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는데 한진해운 사태가 터지며 물류전담팀들이 비상 대책 마련에 돌입했다”고 설명했다.
컨테이너선을 통해 미국으로 화물을 부치는데 통상 한 달가량이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리 늦어도 10월 초까지는 선적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게 관련 업계의 설명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9~10월은 물동량이 많은 해운업계의 극성수기인데 하필 이때를 골라 한진해운에 대한 포기 선언을 하고 법정관리로 떠미는 정부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다”며 “금융당국은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예견하고서도 미리 대책을 세우지도 않았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택일(擇日) 기능마저 포기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때문에 해운업계에서는 정부가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을 한 번 더 연장하는 식으로 ‘지연전’을 펼쳐가며 시장에 미칠 충격을 최소화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법정관리를 늦췄을 경우 적자 누적으로 2,000억~3,000억원의 추가 자금이 필요했겠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천문학적인 손실에 비하면 훨씬 피해가 적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물류대란에 따라 수출에 차질을 빚어 피해를 입은 업체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는 한진해운 사태로 인한 물류피해가 이날 현재 총 32건, 1,138만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해외에 선박이 억류돼 화물의 발이 묶인 업체가 9곳 664만달러에 달했고 △해외 입항거부 4건(47만달러) △해외 반입거부 2건(77만달러) △해외 출항거부 1건(1만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피해 가능성이 큰 우려 사례도 14건, 341만달러에 달했다.
특히 신선식품은 배 위에서 입항 시기를 놓쳐 부패할 경우 손해를 되돌릴 길이 없어 수출입 업체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정부가 급조해 부랴부랴 내놓은 수출 물류대책에도 허점이 많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정부는 현대상선을 통해 대체 선박 13척을 미주 및 유럽 노선에 긴급 투입해 수출 물량을 소화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렇게 동원된 선박은 한국에서 짐을 싣고 항구를 떠나지만 기항지에서는 빈 배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현대상선 경영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삼성·LG전자 등 화주들은 지난주 현대상선 실무진과 만나 운임 등을 논의했으나 난항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화주들은 대체 선박의 운임이 너무 높다는 입장인 반면 현대상선은 빈 배로 돌아오는 비용을 계산하면 지금 운임으로도 적자가 불가피하다고 맞선 것으로 전해졌다.
해운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진해운과 계약을 맺었던 화주들은 현지 해운사들과 접촉해 짐을 실어나르고 있다”며 “한진해운은 물론 한국 해운사들의 글로벌 해운시장 내 영향력이 급속도로 축소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