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 후보에 오른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지난 1947년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 파크리지의 중산층 가정에서 2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휴 엘즈워스 로댐은 감리교 신자였으며 작은 섬유업체를 운영했다. 어머니 도로시는 가정주부였다. 고등학교 시절 토론반 회원, 학급회장 등을 하면서 우등생 자리를 놓지 않았다. 보수적인 성향의 가정 영향으로 어릴 적 공화당에 호감을 지녔던 힐러리는 고교 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 베리 골드워터의 선거캠프에서 일했다. 1965년 입학한 매사추세츠 주의 유명 사립 여자대학인 웰즐리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공화주의자 클럽’ 동아리를 이끌었다. 그러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과 베트남전 등을 거치면서 불어닥친 민권운동 열풍 때 민주당원이 됐다. 힐러리는 당시 학생으로서는 처음으로 졸업연설자로 연단에 올랐고 그 자리에서 여성, 인권 문제 등에 진보적인 입장을 나타내 현지 언론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행정대 회장이던 그는 동기 여대생들에게 “아직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도력과 힘을 발휘할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다.
이후 1969년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해 법조인을 꿈꿨으며 아동 인권법 관련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힐러리는 이곳에서 아칸소주 출신이자 정치적 야망이 매우 컸던 빌 클린턴과 만났다. 도서관에서 자신을 계속 쳐다보는 클린턴에게 다가가 자기소개를 했던 힐러리는 젊은 시절 열렬한 연애를 하며 사랑을 키웠다. 빌은 힐러리가 대선후보로 공식 발표되었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1971년 한 수업에서 힐러리를 봤다”며 “그 이후 우리는 늘 같이 걷고 얘기하고 웃었으며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늘 함께 했다”며 연설 대부분을 당시의 추억에 할애하기도 했다.
◇변호사, 교수, 그리고 퍼스트레이디로
“빌과 함께 하겠다”며 대도시를 마다하고 아칸소 주 변호사가 된 힐러리는 여성 흑인 변호사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이 이끄는 어린이 보호기금(Children‘s Defense Fund, CDF)에서 일하며 로스쿨에서 배웠던 지식을 사회를 위해 활용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가 CDF에 들어간 지 얼마 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힐러리는 1974년 1월부터 법사위 탄핵 조사단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그해 가을부터는 아칸소 대학 로스쿨 강단에 서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듬해 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던 남편 빌 클린턴도 같은 대학 로스쿨 교수로 임명됐다. 1975년 10월 11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1976년 빌이 아칸소 주 검찰총장 선거에 당선되면서 부부는 아칸소 대학을 떠났다. 힐러리는 아칸소 주 최고의 로펌인 로즈 법률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남편이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됐고, 힐러리는 1979년 로즈 법률회사의 공동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했다. 1980년에는 외동딸인 첼시 클린턴을 낳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기간에도 일에 대한 힐러리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1987~ 1991년에는 미국 변호사 협회의 여성회원 회장을 지냈다. 그동안 내셔널 로 저널(The National Law Journal)에서 뽑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변호사 100인’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남편 빌은 1992년 4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힐러리도 퍼스트레이디로 백악관에 입성했다. 빌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힐러리의 유능함을 의식해 자신을 찍으면 ‘하나 가격에 둘을 산다’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했다. 힐러리는 1993년 국민 의료보험 개혁을 맡았다가 공화당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르윈스키 성추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부관계를 보여주며 인기가 다시 급상승했다. 남편의 두 번째 임기 말인 2000년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55%의 득표율)돼 2009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그는 미국에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으로 주목받게 된다.
◇대선 경쟁자의 국무장관…그리고 대권 도전의 꿈을 이루다
힐러리는 2007년 1월 20일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했다. 그러나 경쟁자였던 버락 오바마 당시 후보가 과반이 넘는 대의원을 확보하면서 대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대신 기회가 찾아왔다. 힐러리는 신임 대통령 자리에 오른 오바마 당선인의 지명을 받아 2009년 1월 미국 국무장관에 취임했다. 국무장관으로서 그는 핵 개발에 나선 이란에 대한 강경책과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간 휴전 중재 등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재임 시기에 국무부 공식 이메일이 아닌 개인 스마트폰인 블랙베리의 개인 이메일 계정을 이용해 업무를 처리하는 등 2016년 대선운동 기간에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메일 스캔들’의 씨앗을 남겨놓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2013년 초 국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5년 4월 2016년 미 대선에 출마할 것을 공식 발표했다. 후원자 네트워크, 보좌진 등 선거 캠프 구성은 이미 마친 상태였다. 선거캠프 본부는 뉴욕시 브루클린에 만들어졌다. 2016년 7월 26일, 민주당의 2016년 미국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었다.
◇ 힐러리의 가족
△남편 빌 클린턴
△딸 첼시 클린턴
1980년 아칸소주 태생. 클린턴 부부의 외동딸. 아버지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아칸소 주의 공립학교에 다녔으며 백악관(워싱턴DC)으로 이주한 후에는 사립학교인 시드웰프렌즈스쿨을 다녔다.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학사를, 옥스퍼드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맥킨지컴퍼니와 방송사 NBC, 뉴욕대 등에서 근무했으며 가족이 운영하는 클린턴재단에서도 일했다.
△사위 마크 메즈빈스키
1977년생.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출신으로 현재 뉴욕의 헤지펀드 회사 GH3캐피털에 근무하고 있다. 독실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음.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재정학을 전공했다.
1993년 민주당 행사에서 첼시 클린턴과 만나 친구가 됐다. 당시 첼시 아버지 빌 클린턴은 대통령, 어머니 마저리 메즈빈스키는 민주당 소속 하원의원이었다. 첼시가 1997년 스탠퍼드 대학교에 진학하며 둘의 관계는 가까워졌고, 이후 정식으로 교제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