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극동의 역사를 바꾼 이와쿠라 사절단





‘우리는 관심을 갖고 이들을 지켜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중대한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상류계급은 스스로 지위를 포기했으며 중대한 사회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더 타임즈 1872년9월5일자에 실린 사설의 일부다. 영국 최대 일간지가 왜 이런 사설을 실었을까. 매머드급 일본 정부 사절단에 대한 영국 정부, 기업, 일반인들의 관심이 그만큼 컸다.


영국을 찾은 일본 사절단의 명칭은 줄여서 ‘이와쿠라(岩倉)’ 사절단. 서구 각국은 이들은 주의 깊게 지켜봤다. 규모도 컸지만 정부 요인들이 대거 참여한 실세 사절단이었기 때문이다. 단장인 특명 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부총리급. 네 명의 부사(副使)도 하나 같이 실세였다. 유신 3걸인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훗날 조선 병합에 앞장 선 이토 히로부미가 각각 부사 직을 맡았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일본 요코하마를 떠날 때(1871년12월23일) 규모는 107명. 정사와 부사 밑에 장관급 3명을 포함한 관료 46명에 사적 수행원 18명, 여성 5명을 포함한 유학생 43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73년 9월13일 요코하마로 돌아올 때까지 1년9개월28일 동안 미국과 유럽 각국을 둘러봤다. 정식 방문 국가는 미국과 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프로이센·러시아·덴마크·스웨덴·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위스 등 12개 국가. 방문한 국가마다 황제와 여왕, 대통령 등 국가 원수를 만났다. 당초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방문 대상에 포함돼 있었으나 일정이 길어지는 통에 빠졌다. 귀환 길에는 지중해와 수에즈운하를 거쳐 인도와 싱가포르, 베트남과 홍콩, 상하이에도 들렀다.

고위직 관료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은 러시아의 피터 대제가 근대화를 위해 서유럽을 여행한 이래 이와쿠라 사절단이 두 번째 케이스. 아시아권에서는 최초였다. 일본 메이지 정부의 핵심 실세들이 얼마나 많이 사절단에 참가했는지는 일본에 남은 정부의 이름이 말해준다. ‘유수(留守)정부’. 남아서 지킨다는 의미다. 사절단 지도부는 자신들이 자리를 비우는 기간 동안 유수정부가 변화를 도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정부 운영과 관련한 12개조의 약정까지 맺고 떠났다.

아무리 약정을 맺었어도 정권이 흔들릴 위험을 감수하며 정권 실세들이 긴 여정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국교를 맺은 서구제국의 국가 원수들에게 덴노(天皇·일본왕)의 국서를 전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 개항하면서 무력에 눌려 수용했던 불평등 조항을 ‘만국공법(국제법)’의 취지에 맞게 바꾸는 게 1차 목표였다. 두 번째는 서구 여러 나라의 앞선 문물 습득에 있었다.

목표는 최초 방문 국가인 미국에서부터 어긋났다. 미국은 일본의 요구를 간단히 물리쳤다.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사절단은 오쿠보 등을 일본에 돌려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새로운 지침을 받아오느라 4개월을 까먹었다. 일정이 지체되는 동안 사절단은 미국 곳곳을 훑었다. 수도와 철도 인프라, 산업 시설, 서부 개척에서 교육 제도까지 낱낱이 기록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미국인들은 이런 평가를 내렸다. ‘뭐든지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민족.’ 마침 미국을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 일행이 호화로운 파티로 일관하던 때여서 대조를 이루며 친일 여론이 일었다. 미국 언론은 일본 사절단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10대 소녀 유학생 5명에 대한 보도 비중이 가장 컸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을 처음 방문국으로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국 경제의 성장을 배우고 싶었던 것. 사절단이 나중에 집대성한 기록에는 군사에 관한 비중이 매우 낮다. 출발 이전부터 시찰해야 할 세부 항목 49개를 미리 정하는 등 수많은 계획에서도 군수 공장 방문이나 군제 시찰은 극히 일부였다. 시찰단은 일정의 대부분을 철도와 공장 시설 방문으로 보냈다. 강병 이전에 부국이 우선 목표였던 셈이다. 사절단은 메이지 정부에 어떤 경우든 외국 차관은 위험하며 스스로의 재원으로 산업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가장 환대받은 곳은 두 번째 방문국인 영국. 마침 빅토리아 여왕이 스코틀랜드에서 휴가 중이어서 일행은 영국 곳곳을 누볐다. 방문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분야는 산업시설. 사절단은 전체 일정에서 142개 공장을 방문한 가운데 영국에서만 53곳을 들렀다. 영국의 환대 이유는 대일 수출액이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 사절단 방문 이후 영국제 철도 기관차와 군함, 대포 주문도 크게 늘어났다.


고위직이었으나 평균 나이 32세. 젊은 사절단은 빠르게 세계를 배웠다. 세 번째 방문국인 프랑스부터는 일본 전통의 복식과 무사의 상징(공식 사절단 중 2명을 빼고는 모두 무사 출신)인 칼도 차지 않은 채 서양식 예복을 걸쳤다. 젊은 권력자들이 세계의 흐름에 몸으로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절단은 옷을 바꿔 입고 계획 도시인 프랑스 파리의 하수구까지 경탄하면서도 독자적인 시각을 기록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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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하고 파리 꼬뮌의 저항을 겪었던 직후. 민중 혁명을 금기로 여긴 사절단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우리보다 못한 점을 찾아냈다’고 적었다. 옳던 그르던 자신 만의 시각으로 비판할 것은 비판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 세계 최대의 국가, 아시아와 맞닿아 있어 언제라도 위협이 될 수 있는 초강대국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수도를 제외하고는 반(半) 문명국가로 보았다. 러시아는 마냥 두려워 할 상대가 아니라고 여겼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무사 출신이 대부분인 이와쿠라 사절단에 깊은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국제적으로 만국공법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 것은 큰 나라끼리나 통하는 얘기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게 당하기 마련이다. 작은 나라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실력을 길러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실력을 기르는 데 있다. 프로이센이 그런 길을 걸어왔다. 소국이었으나 이제는 대국으로 성장했다.’ 사절단은 프로이센이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듯이 일본도 아시아의 맹주로 떠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

프로이센에서 영감을 얻는 일본 메이지 정부는 이후부터 독일 배우기에 전적으로 나섰다. 고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명저 ‘일본 제국주의 흥망사’에 이와 관련된 대목이 나온다. ‘사무라이 출신의 개혁가 그룹들은 늦어도 자신들의 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이 유럽의 열강과 견줄 수 있는 강국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그들은 중년이 되기 전에 그 꿈을 이뤘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장기간의 시찰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다. 1878년 ‘특명 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美歐回覽實記)’는 총 5편 100권 분량(요즘 기준으로 두터운 책 5권). 미국과 영국이 각 20권씩 전체의 5분의 2를 차지하고 독일 10권·프랑스 9권·이탈리아, 6권·러시아 5권·벨기에·네덜란드·오스트리아·스위스 각각 3권·스웨덴 2권·덴마크 1권·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 2권·유럽 총론 5권, 직접 방문하지 않고 미리 준비했던 자료로 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합쳐 1권,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거쳐 귀항하는 일정 7권으로 구성됐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업적은 책에서 그치지 않는다. 귀국 직후에는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지 못했다는 책임론에 휩쓸리기도 했으나 대부분 요직을 차지하며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예술 과학 교육 전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한중일 동양 3국이 사용하는 유럽과 미국 지명에 대한 한자식 표음과 표시의 약 30%가 이때 만들어졌다. 학제 개편과 복제, 음식 문화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흔적이 없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히 동아시아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따지자면 연원이 깊다. 일본은 중화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을 거부한 채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했으며 쇄국 기조를 지키면서도 네덜란드와 부분적 통교로 세계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인 1582년 가톨릭 소년 사절 4명이 로마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동양 최초의 구텐베르크 인쇄기도 이때 일본에 들어왔다. 1613년 로마에 도달해 로마시민증과 작위를 수여 받고 돌아온 중급 무사 출신인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4번째 세계일부 항해자로도 손꼽힌다.

개항 이후 이와쿠라 사절단 이전에도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또는 지방의 영주(다이묘·大名)들이 7차례에 걸쳐 연인원 322명을 시찰단 명목으로 유럽 각국에 보냈었다. 유학생은 이보다 숫자가 많다. 정부의 고위직으로 구성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이들이 남긴 모든 자료를 모으고 집대성하고 실제 정책으로 반영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 중국도 여섯 차례에 걸쳐 약 300여명을 유럽에 파견했었다. 목적은 같다. 신문물을 익히기 위해서.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중국의 사절단은 단장을 외국인과 중국인이 공동으로 맡아 불협화음이 잦았다. 눈에 띄는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겨우 기술했다는 기록은 중화 중심의 사고에 여전히 젖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양 3국 가운데 가장 뒤떨어진 곳은 조선. 1881년 조선 조정이 관료 12명과 유학생 등으로 구성된 64명의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4개월간 파견한 게 서양문물을 배우려는 시도의 전부다. 신사유람단이 귀국 후 올린 보고서는 조선의 선비들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으나 우리의 시각은 없다. 자기에 대한 인식과 반성, 미래가 없이 외국 것만 우러러보는 몰 정체성과 외세 의존적 사고가 개항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과할까.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일본 제국주의 흥망사에 따르면 쇼오토쿠 태자 시절부터 배우기 위해 국가적으로 견수사, 견당사를 파견했던 일본은 개항기에 전세계를 교실로 삼았다. 영국에서 해군과 기업을, 미국에서 철도와 통신을 배우고 프랑스에서 법률과 육군을 받아들이다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자 스승을 독일로 바꿨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그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143년 전 이와쿠라 사절단이 지금도 부러우니 참. /권홍우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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