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인의 잠룡(潛龍).’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내년 1월 귀국’을 선언하고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사실상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여야 대권 후보의 밑그림도 서서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통틀어 대략 17명 정도를 유력 주자로 분류하고 있다. 대선이 1년3개월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딱 하나뿐인 대통령 자리를 놓고 잠룡들의 치열한 각개전투가 시작되는 셈이다. 포스트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이후 흔히 말하는 ‘보스정치’가 막을 내리고 여야 양 진영도 대선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다다익선’ 전략을 취하면서 후보군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우선 여권에서는 반 총장 외에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 유승민 의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원유철 의원, 정우택 의원 등이 유력 주자로 거론된다. 반 총장이 여러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는 가운데 김무성 전 대표, 오세훈 전 시장, 유승민 의원 등이 ‘3중’ 구도를 형성하는 양상이다.
반 총장과 정우택·원유철 의원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후보들은 표면적으로는 모두 비박(비박근혜)계로 분류되지만 선거가 15개월가량 남은 현재로서는 이 같은 계파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권의 잠룡 라인업도 화려하기는 마찬가지다.
더민주에서는 이재명 성남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김부겸 의원 등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전 대표가 굳건한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손학규 전 고문도 당적은 더민주이지만 당 내부에서는 문 전 대표를 꺾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안철수·천정배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 등과 함께 제3지대에서 손을 맞잡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이처럼 무려 17명에 달하는 잠룡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경쟁하는 모습은 과거와 비교해 확실히 달라진 풍경이다. 각 여론조사 기관에 따르면 17·18대 대선을 15개월 앞둔 지난 2006년 9월에는 8명(박근혜·이명박·고건·정동영·손학규·김근태·권영길·노회찬)이, 2011년 9월에는 10명(박근혜·안철수·문재인·한명숙·손학규·김문수·유시민·정몽준·정동영·이회창) 정도가 유력 후보로 분류됐었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개인의 카리스마를 무기로 한 보스정치의 시대가 끝나면서 각 계파의 분화·소멸 과정이 빨라지고 있다는 점을 우선 지목하고 있다. 계파정치의 속성이 엷어지면서 맹목적인 ‘충성경쟁’을 펼치기보다는 차차기를 노리며 몸값을 키우기 위해 대선 과정을 경험해보는 후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야 각 진영 역시 반기문·문재인 등의 선두주자가 있지만 ‘플랜B’를 풍부하게 마련해야 흥행 열기를 고조시키는 것은 물론 실제 선거 승리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하고 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국내 정치판에서 ‘영웅의 시대’는 끝났다”며 “웬만한 주지사는 다 대권 경쟁에 뛰어드는 미국처럼 한국 역시 ‘카리스마 정치인’이 세력을 독점하는 시대가 저물면서 후보군의 숫자도 많아지고 스펙트럼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대선이 임박할수록 ‘서바이벌 경쟁’과 이해관계에 따른 ‘헤쳐 모여’가 활발해지면서 후보군이 저절로 압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