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이신우 칼럼] 김좌진의 역사, 김일성의 역사

역사 기술에서 객관성은 제1덕목 현행 검정 교과서들 제대로 지켰나



김일성. 1937년 동북항일유격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보(普天堡) 소재 관공서를 급습해 현장에 있던 일본인 경찰 7명을 사살했다.

김좌진. 1920년 북로군정서 소속 2,500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만주 허룽(和龍)현 청산리에서 일본군 병력 5만명의 제13·14사단 및 21사단과 3차에 걸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장군은 일본군 3개 정규 사단을 와해시킬 정도의 전과를 올렸다. 한국 무장 독립운동 사상 일본군으로는 가장 치욕적 패배였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인생행로는 전혀 다르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을 피해 그해 초겨울 소만(蘇滿) 국경의 미산(密山)에 도착한다. 여기서도 배고픔과 일본군의 추격은 계속됐으나 다행히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소련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련 내 블라고베셴스크로 본영을 이동한다.

청산리 전투에서조차 겨우 수백 명의 사상자만 냈을 뿐인 김좌진 장군은 이곳에서 대부분의 부하를 잃고 만다.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소련군의 배신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우수리강 너머의 일본군과 손을 잡고 독립군 학살을 감행했다. 청산리 전투 다음 해인 1921년 6월이었다.

현장을 간신히 탈출한 김좌진 장군은 8년 후 한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만주 땅의 호랑이, 그의 나이 42세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불리는 이 집단 학살 사건으로 일제 치하 항일 무장 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우리 조국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두 번 다시 이런 무장투쟁 조직을 갖출 수 없었다.

반면 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의 등에 칼을 꽂았던 한인 공산주의자 집단과 김일성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1945년 소련군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북한을 점령해 지금껏 3대가 배고픈 백성의 밥그릇을 갈취하면서 영화를 누리고 있다.

그뿐인가. 김일성은 남북한 모두에서 여태껏 찬양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004년 한 칼럼에서 "김일성은 우리 민족의 가장 암울한 상태에 혜성같이 나타나 참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고 있던 역사학자 강만길조차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항일 빨치산 운동도 독립운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다. 만일 남한이 김일성의 독립운동과 치적을 인정할 경우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소련군에 의해 원한의 죽음을 당한 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의 존재는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일제 치하 무장 독립운동을 짓밟을 수는 없다. 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이 지하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우리네 역사가 매양 이런 식으로 기록된다면 우리 후세에 제2의 김일성은 수없이 배출돼도 제2의 김좌진은 쉽게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 병부령 이사부는 이렇게 건의했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해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진흥왕 이전의 역사적 기억들이 새로 수집되고 책으로 편찬됐다. 모든 사실과 사건에 대한 기록은 주로 지나간 선인(先人)들의 행적을 겨냥했다. 이후의 본격적인 영토 팽창과 3국 통일의 장대한 로망은 신라인의 새로운 역사의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 기술에서 객관성은 제1의 덕목이다. 그럼에도 이런 원칙이 현행 검인정 교과서에서 제대로 지켜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들이나 검정 과정이 조금이나마 객관성을 유지했다면 지금의 좌편향 시비나 국정화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국정화를 욕하기 전에 '자아비판'도 거르지 말아야 할 이유다.

마침 전교조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을 검인정 교과서 관련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고 한다. 현행 역사 교과서 집필진을 특정 이념 성향 집단으로 지칭하거나 김일성 주체사상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비판을 고소 이유로 들고 있다. 그렇다. 이왕 검인정 교과서가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됐으니 내용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과연 국정화 논란이 어디서부터 출발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신우 논설실장 shinwo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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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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