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저가 석유시대의 종말…4차 중동전





1973년10월6일 오후 2시4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협공해 들어갔다. 세계는 놀라운 눈으로 중동을 바라봤다. 전쟁 소식도 그랬거니와 아랍 군대의 기세에 놀랐다. 시리아군의 전차부대는 골란고원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집트군의 수에즈 운하 도하작전은 더욱 빛났다. 미국 군사사학회 부회장을 지낸 존 린 일리노이대 교수가 ‘배틀, 전쟁의 문화사’를 통해 ‘전쟁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도하작전’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이집트군 스스로도 작전의 성과에 놀랐다. 초기 작전의 목표는 교두보 확보. 이스라엘군의 눈 앞에서 수에즈 운하를 강습 돌파해 시나이 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3만여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전사 208명을 내고 목표를 이뤘다. 222대 전투기의 폭격과 3,000문이 넘는 각종 야포의 지원을 받은 도하작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집트군으로서는 1967년 6일 전쟁에서 연전연패했던 수모를 일거에 날려버렸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유대민족 최대의 기념제인 속죄절(Yom Kippur)을 맞아 온 국민이 회개와 명상, 기도에 들어간 순간에 뜻밖의 강 펀치를 맞았다. 물론 징후는 있었지만 하나같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 불과 5개월 전에는 아랍군대의 대규모 훈련에 맞서 동원령을 발동, 1,100만 달러를 날렸었다. 9월 중순에는 이스라엘기가 1대 떨어지고 시리아기는 13대 격추되는 공중전까지 벌어졌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올라왔으나 기고만장해진 이스라엘 정부는 귀를 닫았다. 9월 말에는 오스트리아-체코 국경에서 팔레스타인 범인이 유대인 이민 열차를 탈취하는 인질 사건이 벌어져 정부의 관심사도 온통 인질 구출에 쏠려 있었다. 결과적으로 인질사건은 양동작전의 효과를 발휘한 셈이 됐다. 적지 않은 예산이 수반됐던 총동원령의 후유증도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결정적으로 이스라엘군이 믿는 구석, 아니 방벽이 있었다. 6일 만에 속전속결로 끝난 3차 중동전(1967) 이후 구축하기 시작한 ‘바-레브선(Bar-Lev Line)’이 침략을 저지하고 조기 경보를 발동해줄 것이라 믿었다. 바-레브 선이란 수에즈 운하 동쪽을 따라 이스라엘이 쌓은 모래벽. 길이 170㎞, 높은 곳은 24m에 이르는 방어벽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이 불도저로 바-레브선을 돌파하는데 소요될 이틀 동안 예비군 동원이 가능하다고 봤다. 막상 이집트군은 고압 펌프를 동원하는 창의력으로 이 방벽을 두 시간 만에 뚫었다.

미국도 두 가지를 믿지 않았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기습할 것이라는 첩보와 과도한 친이스라엘 정책이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경고를 가볍게 여겼다. 두 번째 사안, 산유국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왔지만 미국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상황은 실제로 나빴다. 미국 내 수요공급이 한계에 이르러 수입 석유가 늘고, 달러 가치 하락으로 실질 수입이 줄어든 산유국들이 가격을 크게 인상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랐다. 미국의 잉여생산능력이 사라진 터에 중동국가들의 시장 지배력이 커진 상황. 4차 중동전은 저가석유시대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경고와 우려 속에 터졌다.

막을 수 있는 길도 없지 않았다. 훗날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사다트가 아랍의 맹주로서 이집트를 포기하고 이스라엘과 대화를 원했다는 것. 키신저는 “이제 와 보니 사다트는 영토를 원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경제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안보 환경을 위해 이스라엘과 대화를 추진했다”고 회고했다. 사다트는 소련군사고문단을 철수시켜 서방측에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며 이스라엘과 대화를 추진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이집트를 깔 본 이스라엘은 대화가 필요 없다는 입장이었다.

자만에 빠져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은 곤욕을 치렀다.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 전차대가 압도적인 시리아군을 상대로 기적적인 승리를 따내, 전세가 역전될 무렵에는 무기와 탄약이 떨어졌다. 만약 시리아군이 보다 과감하게 공격 루트를 다양화했다면 이스라엘 북부가 휩쓸릴 뻔 했다. 시나이 전선에서도 마찬가지. 수에즈 운하 도하에 성공한 이집트군이 참호를 파고 눌러앉은 게 아니라 그대로 진격했다면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군대는 왜 서전의 승리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했을까. 경직된 사고 탓이다. 현장 지휘관에게 재량권이 없어 승전의 기회를 날렸다. 반대로 이스라엘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참모본부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원한 끝에 반전의 기회를 얻었다. 문제는 체력 방전. 군의 사기는 높았지만 무기와 탄약이 바닥을 드러냈다. 국방장관 모세 다얀은 골다 메이어 수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 번째 사원이 무너지고 있다.’ 솔로몬이 지은 첫 번째 예루살렘성이 바빌론의 의해 폐허로 변하고 재건한 성전은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데 이어 또 다시 유대민족이 타민족에게 점령 당할 판이라는 탄식이었다.


메이어 수상은 무기와 전쟁 물자를 달라며 미국에 매달렸다. 마침 워터게이트 추문에 휩싸여 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단안을 내렸다. 이스라엘 국영 항공사의 비행기로 군수물자를 공급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이스라엘은 비명과 함께 고함을 질렀다. ‘세 번째 사원이 무너지는 판이라면 비장의 무기를 쓰고야 말겠다.’ 미국의 묵인 아래 이스라엘이 남 몰래 개발한 핵 폭탄을 쓰겠다는 협박이었다. 결국 닉슨은 공군에 명령을 내렸다. “보낼 수 있는 것은 다 보내시오.” 이 때가 10월18일. 아랍 산유국들이 모여 석유무기화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스라엘 무조건 지원을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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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명령이 떨어진 지 불과 9시간 만에 전략 수송기 C-141과 C-5가 무기를 가득 싣고 이스라엘로 떠났다. 유럽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 국가들이 미군 수송기의 경유를 허락하지 않는 통에 미국은 포르투갈을 겨우 설득해 중간 기착지를 겨우 얻었다. 맥도널 더글러스의 공장에서 갓 나온 F-4 팬텀은 이 기지에서 출격한 공중급유기의 기름을 받으며 이스라엘로 직접 날아갔다. A-4 스카이호크 전투기는 대서양과 지중해의 미국 해군 항모를 이용하며 이스라엘로 반입됐다. 미국은 33일간 이스라엘에 무제한 공급 작전을 펼쳤다. *

이스라엘은 인도받은 무기를 바로 전장에 보냈다. 미 공군기 도색을 한 채 국기만 성조기 대신 다윗의 별로 바꾸고 출격한 팬텀 전투기도 적지 않았다. 장비 활용과 수리 능력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은 전세를 뒤엎었다. 수에즈 운하를 역 도하, 마음만 먹으면 카이로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골란고원에서도 승리해 다마스커스 진격을 앞두고 있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아랍권은 새로운 무기를 들고 나왔다. 그 것은 석유였다.

패배가 확실해진 10월20일 새벽,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5개 산유국들은 미국에 대한 석유수출 금지를 발표했다. 주요 아랍 산유국 가운데 미국과 전면적인 단계 단절을 주장한 이라크와 친 미국 정책을 구사하던 이란만 빠졌다. 미국은 크게 놀랐다. 감산 결정(16일)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와 비밀 접촉해 ‘더 이상의 조치는 없을 것’이라는 언질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친미 온건국인 사우디는 당초 대미 금수에 반대했으나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공급이 예상보다 훨씬 대규모라는 점에 격분, 강경론에 합세했다.

다급해진 미국이 4차 중동전 마무리에 나섰다. 휴전을 중재했으나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버텼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달래 24일 휴전을 맺었으나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휴전 발효 불과 몇 시간 만에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휴전 감시를 위해 미국과 소련의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러시아 이래 중동 진출을 염원했던 소련은 이 제안을 덥석 물었다. 소련은 미국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단독이라도 출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일부 공수사단은 출동 채비를 갖춘 채 공항에서 명령만 기다렸다. 이 때가 24일 오후 10시45분.

심야에 국가안보회의를 긴급 소집한 닉슨 대통령은 전세계 미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전략공군 사령부의 핵 폭격기들은 출격 준비를 마쳤다. 일방적인 파병은 세계 평화를 깨뜨리는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미국의 단호한 대응에 소련은 물러섰다. 결국 다음날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상임이사국을 제외한 안보리 회원국의 군대를 휴전 감시병력으로 파병하기로 결의하며 4차 중동전은 끝났다. 이후에도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으나 확전되지는 않았다.

미국과 소련 간 3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에 떨던 지구촌은 안정을 찾았을까. 천만에. 미증유의 사태를 맞았다. 아랍국가들의 허풍으로만 여겼던 석유 무기화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다. 4차 중동전 직전까지 배럴당 2.6달러~3.1달러였던 국제 유가가 12월 11.65달러로 뛰고 현물시장에서는 22.6달러라는 입찰가도 나왔다. 1차 석유파동의 한파가 닥친 것이다. 영국은 공장가동을 월 3주로 제한하고 한국과 일본은 친아랍정책으로 돌아섰다. 한겨울에 서머타임제를 도입한 미국의 유류난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빠져 있던 닉슨 대통령의 지지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1861년부터 현대까지 국제유가 추이. 인플레이션 요인을 감안하면 1차 석유파동기의 실제가격이 요즘과 비슷하다.1861년부터 현대까지 국제유가 추이. 인플레이션 요인을 감안하면 1차 석유파동기의 실제가격이 요즘과 비슷하다.


이듬해 3월 금수조치 해제 후에도 계속된 유가 상승의 혜택은 누가 봤을까. 산유국이 아니라 석유 메이저와 일본. 절약분위기 속에서 일제 소형 자동차와 절전형 가전제품이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산유국들의 석유수출 수입이 1972년 230억달러에서 1977년 1,400억달러로 늘어났지만 달러가치 하락 탓에 실질 수입은 그다지 늘지 않았다. 그나마 수입 증가분도 수차례 중동전쟁을 통해 소련제보다 성능이 월등한 것으로 판명된 미국제 무기 수입에 들어갔다.**

한국도 고통을 겪었다. 1973년 14.9%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이 1974년 8.0%, 1975년에는 7.1%로 떨어졌다. 국제수지 적자 폭도 5억6,000만달러에서 19억3,000만달러로 확대되고 도매물가가 42.1%, 소비자물가가 24.3%씩 올랐다. 경제에 골머리를 앓던 박정희 대통령이 외교·안보와 경제를 분리하는 이원집정부제를 한때 고민하기 시작한 게 이 시기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제4차 중동전(10월 전쟁, 아랍에서는 라마단 전쟁, 이스라엘에서는 욤 키푸르 전쟁으로 통칭)에서 미국이 보여준 전략 수송과 이스라엘의 활용은 병참의 기적으로 손꼽힌다. 아무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군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전략 수송기가 발진했던 대목은 미 공군의 비상 대기체계가 얼마나 신속 정확한지를 말해준다. 이스라엘은 더 하다. 인도받은 병기를 바로 전선에 투입해 써 먹었다. 그만큼 군용 장비에 대한 이해와 운용 능력이 뛰어났다는 얘기다. 병력의 질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은 전투기 한대에 수명의 숙련된 조종사가 있었으나 아랍국가들은 보유 전투기보다 조종사의 숫자가 적은 경우가 많았다. 미국은 4차 중동전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팬텀기 50대(50대 추가 약속)와 스카이호크기 36대, C-130E 수송기 12대를 보냈다. 한국에는 1980년대 중반까지 절대로 판매할 수 없다던 M-60 탱크도 100대 이상 제공했다.

미국이 ‘니켈 그래스 작전(Operation Nickel Grass)’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 공수한 무기는 2만2,325t에 이른다. C-141 141대, C-5 77대(연 동원 기준)가 쉴 새 없이 무기와 탄약을 날랐다. 바다를 통한 물자 공급도 3만3,210t에 달했다. 소련도 비슷한 규모로 시리아와 이집트에 무기를 제공했으나 아랍국가들은 바로 전장에 투입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과 소련의 무기 공급으로 4차 중동전이 끝난 후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전투에서 상실한 장비 이상의 수량을 보유하게 됐다. 다만 이집트에 대한 소련의 무기 공급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집트가 자주적인 대화 노력을 펼쳤기 때문이다.

** 중동전쟁의 발발과 아랍과 이스라엘 간 대립의 원인까지 모두 기획된 것이라는 음모론도 없지 않다. 미국의 폭로 저널리스트 윌리엄 엥달은 저서 ‘석유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을 통해 1973년 5월 스웨덴 샬트세바덴에서 개최된 빌더버그 회의가 국제 유가를 베럴당 평균 3.5달러에서 10~12달러로 올려야 한다는 비밀보고서를 채택한 지 5개월 뒤 4차 중동전이 터지고 1차 석유 위기로 이어졌다고 진단한다. 빌더버그가 로스차일드가를 비롯한 유대계 비밀 자본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비밀 결사인 프리메이슨과도 연관이 깊다는 음모론도 끝없이 나온다. 쏭홍빈의 팩션 ‘화폐전쟁’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몇 가지 증거가 있어도 빌더버그가 정말 세계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세력인지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비밀주의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거세지고 있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음모론 공방은 세계적 불황이 몰고 온 그늘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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