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영국 역사상 가장 위기의 순간에 수상이 됐다. 2차대전 초기 전세를 장악했던 독일은 유럽 대륙을 삼키려는 야심을 노골화하고 있었다. 독일과의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 지휘부는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으며 실제로도 패배주의가 폭넓게 퍼져 있었다. 프랑스 정부를 방문한 처칠이 프랑스 지도자들의 무기력과 자포자기에 경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영국 국내 상황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독일과의 유화정책을 고수하던 네빌 체임벌린 수상이 초기 대응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전시내각을 이끌게 된 처칠에게 주어진 책임은 막중했다. 프랑스의 함락이 기정사실이 되면서 국민의 불안은 높아갔고 거세져 가는 독일의 공세 앞에 영국의 운명 또한 풍전등화의 신세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최악의 순간에도 처칠은 비관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취임 직후 의회 연설에서 그는 “우리의 목표는 승리”라며 나치의 위협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독일이 영국 전역에 폭격을 퍼붓는 상황에서도 피해 지역을 찾아 연설하며 결전을 독려했다. 후일 영국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전쟁을 주도하는 데 지도자의 투지가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에 처칠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순신이 있다. 원균의 전사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에게 남겨진 것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인 보잘것없는 전력뿐이었다. 병력의 미약함을 알고 있는 조정에서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종사(從事)하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절대적인 열세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10척 남짓한 전선을 이끌고 길목을 지켜 적의 거대 선단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이순신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은 정확한 정세판단에 기초한 합리적 낙관론이었다. 수군을 통한 항전을 주장하며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그는 수년간 적이 충청·전라도로 곧장 돌진해오지 못한 이유로 수군이 바다에서 길목을 막은 점을 들었다. 적은 병력으로도 힘을 다하면 해볼 만한 싸움이며, 과거의 연이은 패배로 자신을 두려워하는 적의 심리를 이용할 것이라는 전략도 덧붙였다. 처칠 역시 2차대전 발발 전부터 히틀러를 주시하며 대응책을 모색해왔다.
북한 핵실험 등으로 우리의 안보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위중하다. 구한말을 떠올리게 하는 한반도 주변 세력판도 속에서 주권과 국익을 지키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상황의 긴박함을 받아들이고 해법을 찾는 데 힘을 모아야겠지만 그렇다고 비관하거나 위축될 것은 없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 지키기에 온 몸을 바친 병사들과 그들의 뒤를 이으려는 자랑스러운 청년들이 있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처칠의 혜안대로 어려울수록 도전해 기회를 만드는 현실적 낙관론이 필요한 요즘이다.
박창명 병무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