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애빌린 역설과 첫 번째 펭귄

정양호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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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여름 주말 저녁이었다. 미국 텍사스의 한 가정에서 사위의 방문을 맞아 장인이 외식을 제안했다. 모두 시원한 집에서 쉬고 싶었지만 다른 식구들이 외식을 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모두 찬성을 한다. 그들은 에어컨도 없는 낡은 차를 타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세 시간이나 걸리는 애빌린에 가서 맛없는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사위가 “오늘 저녁 괜찮았죠?” 하고 운을 떼자 장모가 먼저 “사실 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들을 위해 찬성했을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모두 마음속에 있었던 외식 결정에 대해 불평불만을 털어놓는다.

사실은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아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동참하게 되는 상황을 ‘애빌린 역설(Abilene Paradox)’이라고 한다. 나서기를 꺼리는 공직사회에서도 애빌린 역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애빌린 역설을 용감하게 깨는 사람이 바로 ‘첫 번째 펭귄(First Penguin)’이다. 펭귄은 물에 들어가야 먹이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물속에는 바다표범 등 무서운 사냥꾼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모두 입수를 주저하게 된다. 이때 한 마리가 뛰어든다. 첫 번째 펭귄이다. 위험을 감수한 용감한 놈이다. 그제야 다른 펭귄도 따라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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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공직사회에서도 첫 번째 펭귄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첫 번째 펭귄을 널리 알려 본받게 해야 한다. 조달청에서 입찰참가자격 전자확인시스템을 구축한 용감한 첫 번째 펭귄이 있어 그 사례를 소개한다.

국가계약법에서는 ‘경쟁입찰의 참가자격’을 ‘개별법령을 위반하지 않는 자에게만 준다’고 규정하고 있다. 말은 쉬운데 현장에서 개별법령 위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우리나라 법령이 44개 분야에 3,925개나 되기 때문이다. 입찰자격 제한내용을 문의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법령을 직접 찾아보고 답변하는 방식은 잠재적 오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인허가 기준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나라장터에서 쉽게 조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다. 누구나 그 필요성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갔다.

드디어 첫 번째 펭귄이 나왔다. 수많은 고민과 시도 끝에 법제처의 법령 데이터베이스를 나라장터와 연계해 입찰 참가자격을 쉽게 조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2006년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로써 많은 기관은 공동으로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됐고, 응찰기업들은 자격요건을 증빙하기 위한 연간 10만여건의 서류를 제출할 부담을 덜었다. 이제는 애빌린 역설과 같은 거짓된 합의를 깨는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시대에 맞지 않는 제도를 보면서도 지금까지의 관행이니까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그대로 따르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 가끔은 길이 아닌 길을 가자. 내가 먼저 새로운 길을 만드는 첫 번째 펭귄이 돼보자.

정양호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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