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칼럼] 조작된 진실, 조작된 주가

권구찬 증권부장

장외주식 적정가 매기기 어려워

이희진 부당이득금 산정 모호

자본시장 질서 파괴한 증권범죄

사법부 일벌백계로 재발 막아야

권구찬 증권부장권구찬 증권부장


“이 바닥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등이 되거나 더 똑똑해지거나. 그게 아니면 사기를 쳐야 돼.”

2008년 월가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마진콜: 24시간, 조작된 진실’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다. 굴지의 투자은행 회장 역을 맡은 제러미 아이언스가 새벽녘 긴급회의를 주재하면서 한 말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아이언스가 헬기를 타고 맨해튼 투자은행 옥상에 내려 소집한 이사회의 결론이기도 하다.

영화 ‘마진콜’은 쓰레기나 다름없는 모기지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알아챈 투자은행이 보유자산을 단 하루 만에 죄다 팔아 치우고 이것이 결국 다음날 월가의 공멸과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다는 게 주요 줄거리다. 다소 과장은 있지만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탐욕에 허우적대는 인간의 내면 심리와 월가의 치부를 잘 드러낸 금융스릴러다.


2011년 화제작을 떠올린 것은 최근 세간의 주목을 끈 ‘청담동 주식 부자’ 이희진의 스토리 역시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에서다. 이씨가 나이트클럽 웨이터와 막노동을 전전하다 주식투자회원 사이에서 황제처럼 군림한 것은 영화 소재로 손색이 없다. 수영장 딸린 호화주택에다 여러 대의 슈퍼카를 거느리다 꼼짝없이 철창신세를 진 대목은 흥미를 배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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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검은 거래는 월가를 다룬 영화 속의 배경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거래 대상인 파생상품과 장외주식의 차이가 있을뿐더러 스케일이나 돈의 규모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럼에도 굴지의 투자은행과 일개 주식브로커라는 차이를 뺀다면 속성은 엇비슷하다. 돈과 탐욕 앞에 ‘나만 살면 된다’는 몰염치와 무책임, 희박한 죄의식은 닮은꼴이다. 이씨는 옥중 편지에서 “저를 나쁘게만 보는 것 같아 너무 슬프다”고 했다. 서한에서는 60대의 노후자금을 털어먹고 10년 저축한 돈을 한방에 가로채고도 일고의 반성이나 일말의 죄의식조차 찾을 수 없다.

검찰과 금융당국 안팎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이씨는 매우 영리한 인물이라고 한다. 주식투자로 수백억대 자산을 끌어모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렇긴 하지만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는 방책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동생을 대리인으로 끌어들인데다 유사투자자문회사를 금융당국에 신고하고 운영하면서 합법적인 브로커로 활동했다. 검찰은 1,670억원 규모의 무인가 주식 매매와 유사 수신(240억원), 사기성 부정거래(150억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 중 핵심 처벌 규정은 사기성 거래로 부당이득을 편취한 혐의에 있다. 법원의 판단을 지켜봐야겠지만 부당이득 150억원 편취는 현행 양형기준상 가중처벌까지 적용하면 7~11년의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다.

문제는 장외주식은 상장주식과 달리 적정가치를 산정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형량을 좌우하는 부당이득금액의 산정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얘기다. 이씨는 자신의 비리를 고발한 서울경제의 첫 보도 직후 유료방송에서 “내가 조사를 받는다면 지금 방송을 하겠는가”며 허세를 부린 것이나 검찰 조사에서 다른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부당거래 혐의는 강력 부인한 것이 어쩌면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증권범죄는 자본시장을 좀 먹는 바이러스나 다름없다. 몇몇의 분탕질만으로도 금융시장의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진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증권범죄를 시장 질서를 흔드는 중대범죄로 규정하고 엄하게 처벌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 법원은 2008년 희대의 피라미드 사기꾼 버나드 메이도프에게 15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증권범죄 집행유예 비율이 10명 중 7명에 이른다는 사법연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법부가 그동안 지능형 화이트칼라 범죄에 유독 관대하다는 비판은 끊이지를 않았다. 이희진 사건은 사법당국과 금융당국이 3년 전 증권범죄 양형기준과 처벌규정을 강화한 후 장외주식 범죄에 대한 첫 번째 법의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영화 속 ‘조작된 진실’처럼 청담동 주식부자의 조작된 장외주식이 면죄부를 받아서는 안 될 일이다. /chans@sedaily.com

권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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