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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피

[식담객 신씨의 밥상]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솜사탕'



어린 시절부터 난 개를 좋아했습니다. 살던 동네가 워낙 외진 시골이라 또래 친구라곤 찾아보기도 힘들었고, 넉넉치 않은 살림살이에 장난감은 호사스런 망상일 뿐이었습니다.

여느 시골집이 그렇듯 우리집도 개를 여러 마리 키웠습니다. 유일한 영장류 친구인 형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내게 친구는 멍멍이들뿐이었습니다. 난 항상 개들과 달리고, 과자를 나눠먹고, 덤불 위에서 뒹굴었습니다.


개들은 내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여섯 살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형제에게 무척 엄하셨던 아버지는, 어쩌다가 쉬시는 날이면 멍멍이 친구들을 하나 둘 냇가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실 땐 항상 아버지 혼자였습니다.

난 어머니께 메리와 누렁이와 짱구가 도대체 어디로 갔냐고 여쭈었고, 어머니는 내 친구들이 하늘나라에 갔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쉬셨던 어느 가을날, 난 냇가 옆 큰 나무에 매달린 장군이를 보았습니다.

주황색 나일론줄에 목이 묶인 채 희미해져가던 장군이의 눈빛을 바라보며, 내가 해줄 수 있었던 일은 그저 눈물을 글썽이는 것뿐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저녁 난 저항했습니다. 이웃 아저씨들과의 술자리에서 아버지는 동네에서 신동소리 듣던 형 자랑에 한창이셨습니다.

마침 내가 눈에 띄었고, 뭐라도 하나 칭찬할까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그만두셨습니다. 뭐 하나 잘난 구석이 없었으니까요. 마지못해 내게 커서 뭐가 되겠냐고 묻는 성은을 베푸셨습니다.

“전 커서 개가 될래요.”

너무 어이없으셨는지, 아버지는 평소답지 않게 회초리 한 번 안 드시며 왜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야 아빠가 잡아 잡수시죠!”

아버지를 호랑이나 귀신보다 두려워하던 여섯 살 꼬마에게는 목숨을 건 반항이었습니다. 아마 죽어간 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끝내 날 때리지 않으셨습니다.

스무 살 무렵, 집에 멍멍이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귀한 집에서 키우던 녀석이라 성깔이 장난이 아니라고, 그러니 만지지 말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다른 가족들은 녀석의 사나움을 겪은 듯 보였습니다. 물려봤자 죽기야 하겠냐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녀석은 곧 수줍게 악수하듯 내 손을 살짝 핥았습니다.

가족들은 녀석을 ‘벤지’라고 불렀습니다. 1980년대에 벤지라는 강아지 외화가 있었는데, 거기 나온 멍멍이랑 녀석이 털빛을 제외하고 빼다 박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일하게 나만 녀석을 해피라고 불렀습니다. 솜사탕처럼 복슬복슬한 흰털과 까만 눈동자는 내 맘을 푸근하게 해줬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 즐거웠던 날들엔 항상 솜사탕이 있었습니다. 소풍과 운동회에 가면 항상 오토바이에 매달린 솜사탕 기계가 반가웠습니다. 가난과 불화로 찌글찌글했던 유년시절이었지만, 그날들만큼은 한숨이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고작해야 분홍소세지에 시금치와 단무지가 박힌 김밥, 그리고 사이다 한 병이 다였지만, 떠들썩하고 화사한 그 공기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습니다.

솜사탕이 있는 풍경이.

해피가 우리집에 있었던 기간은 2년이 좀 안 됩니다. 그리고 내가 녀석과 함께 한 기간은 한 달 남짓입니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가끔 시골집에 내려가면, 해피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해피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얼마든 나를 기억해줬습니다.

두 달이 지났든 세 달 만에 나타났든 수줍게 반겼습니다.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밥을 주는 사람보다도 나를 더 따랐습니다.


한 번은 가족들이 함께 녀석을 가운데 두고, 누구에게 가는지 시험해 봤습니다. 녀석은 잠시 망설이더니 살짝 내 손을 핥고는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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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무렵엔 유난히도 답답함이 많았습니다. 마당에서 담배를 물고 있으면, 녀석이 또로록 방울소리를 울리며 다소곳이 내 곁에 앉았습니다.

난 해피에게 이런 저런 서러움과 한숨거리를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해피는 내 얘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뭔가 얘기를 하려는 듯 웅얼거리기도 했습니다.

덩치 큰 청년과 성견이 된 멍멍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 속에서, 우리는 다정한 오누이였습니다.

스물 한 살 10월, 난 고교졸업 이후의 방종에 대한 죄가를 치르러 군대에 갔습니다.

우리집은 훈련소 부근이라 걸어서 입대했습니다. 대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해피에게 오빠 간다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녀석은 동네 다리 앞까지 나를 배웅했습니다. 또로록 방울소리에와 애처러운 눈망울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군대 다녀와서 꼭 다시 마당에서 함께 햇볕을 쬘 거라고 되뇌였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습니다.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훈련인 야간 행군일 저녁, 나는 해피를 만났습니다. 총 8시간의 훈련시간 동안, 매시간 50분 행군 후 10분 동안 휴식이 주어집니다.

운 좋게도 첫번째 휴식지가 우리집 부근이었습니다. 설마하면서도 내심 기대했던 일, 해피가 또로록 방울소리를 내며 내게로 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수줍게 내 손을 핥았습니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녀석을 들여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습니다.

8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시에 움직이기에, 난 녀석이 걱정되었습니다. 결국 난 해피를 발로 차서 겁을 줬고, 녀석은 그제서야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래도 내심 흐뭇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멋진 경험을 하는 녀석은 세상에 나말고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바보처럼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내 첫 휴가는 입대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훈련소 조교로 자대배치를 받아, 분대장 교육 수료 후 바로 바깥 세상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한달음에 집에 도착했습니다.

부모님께 인사 올리기 무섭게, 일반미로 지은 밥을 김치볶음 하나에 다섯 공기나 채워 넣었습니다. 포만감에 행복해질 무렵, 해피가 보이지 않는 걸 눈치챘습니다. 난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여쭤봤습니다...

“죽었다. 새끼 낳다가...”

갑작스런 서글픔이 밀려와 마음이 아렸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머릿속이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행군 도중 내가 녀석의 배를 발로 찬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날짜를 되짚어 보니, 해피는 내게 맞고 나서 며칠 후 새끼를 낳다가 떠났습니다. 녀석은 무거운 몸으로 나를 보려고 왔던 겁니다.

“해피 어디에 묻었나요...?”

녀석의 무덤가에서 한참 동안 소주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해 질 무렵에야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튿날 눈이 퉁퉁 부었던 걸로 보아, 꽤 꺽꺽대고 울었던 것 같습니다.

해피에 대한 기억입니다.

한 번쯤 끄적여 보고 싶었는데, 괜시리 궁상맞아 망설였던 이야기.

어느덧 21년이 지났습니다. 해피는 가끔씩 꿈속으로 찾아오곤 합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내 얘기에 가만히 귀 기울입니다. 볕이 아주 좋은 날, 따스한 햇살 아래, 솜사탕처럼 복슬복슬한 해피가 품에 안깁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정가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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