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세계 빈곤퇴치의 날

/EPA연합뉴스/EPA연합뉴스




10월17일. 국제연합(UN)이 정한 ‘세계빈곤퇴치의 날’이다. 1992년 처음 지정된 세계빈곤퇴치의 날은 올해로 24회를 맞았다. 하지만 원조는 따로 있다. 1987년10월17일 프랑스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10만명의 인파가 치른 ‘절대빈곤퇴치운동 기념비’ 개막 행사가 ‘빈곤퇴치의 날’의 시초로 꼽힌다. 기념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가난이 있는 곳에 인권침해가 있다. 인권 보호는 우리의 의무다.’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장소이기에 ‘인권광장’으로도 불리는 트로카데로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모인 이유는 두 가지 때문. 빈곤과 양극화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진데다 행사를 주도한 인물이 조셉 레신스키(Joseph Wresinski) 신부였기 때문이다. 평생을 빈곤퇴치 운동에 바친 레신스키 신부는 빈곤에 대해 남 다른 철학과 실행력을 지닌 성직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과 옷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라며 빈민촌에 도서관과 교육시설을 지었다.

레신스키 신부가 이듬해인 1988년 71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 ‘빈곤 탈출만큼 중요한 인권 신장은 없다’는 인식이 퍼지고 UN은 ‘세계빈곤퇴치의 날’까지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UN은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적인 노력을 기울이자는 결의도 곁들였다. 국제적인 관심으로 빈곤은 줄어들고 있을까. 세계은행에 따르면 하루 수입 1.25 달러 이하인 절대 빈곤인구가 1990년 43.1%에서 2010년에는 20.6%로 줄어들었다. 통계가 정확하다면 세계빈곤퇴치의 날을 정하면서 ‘2015년까지 절대빈곤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UN의 목표가 나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빈곤은 정말 줄어들었을까. 전제가 필요하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경제학)는 ‘빈곤의 종말’을 통해 빈곤 해소가 미래를 여는 열쇠라고 단언한다. ‘빈곤은 절망의 온상이며 테러나 폭력의 원인’이며 ‘풍요만이 테러를 막을 수 있다’는 진단도 내렸다. 제프리 삭스의 기대처럼 절대 빈곤은 줄일 수 있더라도 문제는 상대적 빈곤과 구조적 빈곤에 있다.

흔히 가난한 사람에게 물고기를 줘서 연명하도록 도와주기보다 낚시를 알려주면 평생 먹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이 낚시법을 배워도 빈곤을 탈출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잡은 생선을 생계비 이하의 헐값에 팔도록 강요하는 시장 메커니즘 속에 거대 다국적 회사들의 규모가 커 간다. 세계 어업생산량이 하루 1,200만톤에 달해도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95%가 하루 2달러 이하로 근근이 살아갈 뿐이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구조적 빈곤의 실상은 더욱 참혹하다. 1998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 하바드대 교수는 ‘정체성과 폭력’에서 ‘미국을 위시한 G8 국가들은 세계 무기거래의 85%를 차지하는 죽음의 상인으로 빈국들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사악한 양분을 공급해왔다’며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는 내전에 따른 파괴와 무기 구입을 위한 재정 고갈에 허덕이는 구조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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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대 부자나라 미국의 심장인 월가는 지난 2011년 ‘우리가 99%’라고 외치는 점령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불평등과 양극화 해소를 요구하는 월가 점령 시위는 언제든지 재발할 위험성과 폭발력을 갖고 있다. 프랑스의 소장파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세습 소득 또는 자본수익율(r)이 노동 소득 또는 경제성장률(g)보다 높다’는 내용의 ‘21세기 자본’을 출간한 뒤 세계적인 경제학자 반열에 올랐다. 피케티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의 빈부격차는 약탈과 정복, 귀족들이 판치던 로마 시대보다 심하다.

무엇이 빈곤을 구조화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가. 무한경쟁과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주도한 세계화, 승자독식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독일 언론인 한스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은 ‘세계화의 덫’(1997년·국내 번역서 출간 기준) 제 1장에 ‘세계의 지배자들이 20 대 80의 사회를 열기 위해 정신없이 돌아 다닌다’고 썼다. 로버트 프랭크 코넬대 교수와 필립 쿡 듀크대 교수는 공저 ‘승자 독식 사회’(2008)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세상은 이미 20 대 80 사회를 넘어 1 대 99로 가고 있다.’

2001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셉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2012년)를 통해 더욱 섬뜩한 경고를 날린다. 1 대 99 사회가 고쳐지지 않는 한 모든 부문에서 잠재력이 떨어져 인류의 미래 역시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혜성같이 등장해 ‘락스타 경제학자’로도 불린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0.1% 부유층의 독식 구조를 강조한다. 1 대 99가 아니라 실제로는 0.1 대 99.9의 불평등 시대가 오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불평등 지수가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미국을 곧 추월할 전망이다. 피케티의 시각에서 한국 경제사를 바라보면 불평등이 가장 낮았던 시기는 한국전쟁 직전. 토지 개혁으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민들의 소득 구조와 수준이 비슷했던 시기다. 법인세율을 최고 80%까지 거뒀던 제3공화국 후반기 즉 고 박정희 대통령 말기도 조세 형평성이 높았던 시기로 꼽힌다.

우리 사회는 불평등과 양극화, 빈곤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인구 고령화와 부익부 빈익빈 현상 심화 탓이다. 최근 통계로 3년간(2011~2014) 상위 부자 10%가 국민 전체 이자소득의 91%, 배당소득의 94%를 쓸어갔다. 돈 뿐 아니다. 사회적 계층 간 사다리가 없어지고 있다. 교육과 직업은 대물림되고 아이들은 꿈과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같은 절대적 빈곤은 물론이고 상대적 빈곤과 구조적 빈곤에서도 한국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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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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