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왕과 나'...그리고 태국 왕실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서거로 태국 국민들이 슬픔에 잠겼다. 온 국민이 상복(喪服)을 입으려는 통에 검은 색과 흰 색 옷감까지 동났다. 한류 스타들의 공연을 포함한 각종 행사와 축제도 중단됐다. 국장(國葬)과 추모 분위기는 몇 달을 넘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든다. 태국인들은 본래부터 국왕을 존경하고 사랑했을까. 그렇지 않다. 반란은 물론 국왕이 의문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태국에서 국왕이 절대적인 권력은 물론 국민들의 신망을 얻게 된 시기는 19세기 중엽부터. 라마 4세, 몽끗왕(King Mongkut)이 등장한 이후 태국 국민들은 국왕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몽끗왕은 1956년 개봉작 ‘왕과 나’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정작 태국인들은 ‘감히 왕실과 국왕의 사랑을 영화의 소재로 삼았다’며 불쾌하게 여기는 이 영화에서 율 브리너가 맡은 배역이 바로 몽끗왕이다.*


몽끗왕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보위에 오르기 전 27년을 승려로 지내며 백성들과 어울리고 어려운 사정을 잘 들어준 덕분이다. 즉위한 뒤에도 마찬가지. 시장의 술주정뱅이에게도 민심을 들었다. 국왕이 일반 백성과 직접 만난 것은 태국 역사상 몽끗왕이 처음이다. 타계한 라마 9세, 푸미폰 국왕도 몽끗왕과 닮은 꼴이다. 78세였던 2006년에는 극심한 가뭄 지역을 찾아 일주일간 식음을 끊고 국민들과 고통을 나눴다.

몽끗왕은 태국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업적은 크게 세 가지. 외교와 종교개혁, 사회개혁이 몽끗왕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태국이 여느 아시아 국가와 달리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몽꿋왕의 ‘휘지만 부러지지 않는다’는 대나무 외교 덕분이다. 승려 생활부터 추진했던 경전 중심의 불교로의 회귀, 타락했던 현실 불교에 대한 개혁운동은 종교는 물론 백성들의 의식 변화도 이끌어냈다. 서양 학계에서는 몽끗왕을 ‘태국의 마르틴 루터’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즉위하기 전의 그는 종교는 물론 언어와 과학 등 온갖 공부에 매달렸다. 밀려난 왕위계승권자로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1804년10월18일 부친인 라마2세의 43번째 아이(38남35녀 중 23남)로 태어났으나 그의 어머니가 정실 부인이었기에 왕세자로 키워졌다. 그러나 부친이 타계했을 때 세도가인 ‘분낙’ 가문의 조정으로 이복형에게 왕위를 내준 뒤부터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끊고 라틴어와 영어, 과학기술을 익혔다.**

제국주의 침략이 한창이던 1851년 라마 4세로 즉위한 몽꿋은 영국과 프랑스에 밀려 불평등조약**을 맺었으나 독립을 지키며 적극적인 산업진흥책을 펼쳤다. 무엇보다 주목한 것은 쌀. 경작을 장려하기 위해 법을 고치고 중국인을 대거 받아들였다. 마침 동남아 식민지의 주곡 문제로 고민하던 영국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태국은 거대한 쌀 생산지로 거듭났다. 관광상품으로 각광받는 궁궐들도 미얀마와의 전쟁에서 황폐해진 궁궐을 몽꿋왕이 복원한 것이다.


도로와 운하의 신설과 확장, 모든 종교에 대한 광범위한 관용 정책 실시, 강제 노역의 축소와 노예제의 점진적인 폐지, 영어교육 실시 등도 그의 업적이다. 과학 진흥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아직도 ‘태국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천문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몽끗왕은 1868년 개기 일식이 일어날 시기와 지역을 직접 예측한 뒤 서양 과학자들과 함께 관측에 성공, 과학자로서 국제적 명망을 떨쳤으나 이날 밤 말라이아에 걸려 64세의 나이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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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끗왕이 17년이라는 길지 않은 재위기간 동안 뿌린 근대국가를 향한 씨앗은 아들과 손자인 라마 5세, 라마 6세의 치세에 꽃피었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한 독립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며 1차 대전 직후에는 승전국의 일원으로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당당하게 참석했다.*** 왕의 초상이 실린 돈은 접지도 않는다는 태국인들의 국왕에 대한 존경심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영어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몽끗왕은 즉위 직후부터 왕자와 공주, 후궁들에게 영어 교육을 시켰다. 태국 왕실 영어 교사의 한 사람이었던 미망인 안나 레어노웬스 부인의 회고록을 토대로 소설과 연극, 영화가 만들어졌다. 태국인들은 ‘안나 부인은 몽끗왕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며 스토리 설정 자체를 부인한다. ‘존엄한 국왕의 외국 여자와 러브스토리’인 영화 ‘왕과 나’는 태국에서 상영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왕과 나’는 허구일 가능성이 크지만 몽끗왕이 후사에도 열정적이었던 것 만큼은 사실이다. 몽끗왕이 아내 56명에게서 얻은 39남43녀의 자녀 가운데 2명만 출가하기 전에 낳은 자식이다. 승려였던 27년 동안 독신과 금욕생활로 일관했던 몽끗왕은 47세에 즉위해 64세로 승하하기까지 자식 80명을 낳았다.

** 몽끗왕은 즉위한 뒤 누구에게도 보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왕위 승계를 막아 오랜 동안 승려생활을 하게 만들었던 분낙 가문을 오히려 중용해 충성을 이끌어냈다.

*** 당초 태국의 군부는 동맹국(독일) 편에 서기를 주장했으나 국왕 라마 6세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을 결정, 유럽 전선으로 병력을 보내다. 이 때가 태국의 전성기. 1932년 쿠테타 이후 입헌군주국으로 바뀐 태국은 2차 대전에서 중립을 표방했으나 일본의 힘에 밀려 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태국이 영국과 프랑스에 할양했던 영토를 되돌려주는 등 호의를 보였다. 결국 태국은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하기에 이르렀다.

흥미로운 대목은 미국이 태국을 적국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 왕족인 세니 프리못 워싱턴 주재 태국 대사가 ‘대미 선전포고문’ 전달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절차상의 문제’로 태국의 선전포고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이 패망한 뒤 태국 정부는 부랴 부랴 국왕의 발표 형식으로 ‘일본과 공수 동맹 체결 및 대미 선전포고는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기에 무효’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영국과 프랑스에게 되찾았던 영토를 다시 떼어주고 미국의 눈치를 살피던 태국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병력을 파병하고 쌀을 보냈다.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점을 입증할 기회로 여긴 것 같다. 터키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도 비슷하다. 1·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편에 섰다 전쟁 막바지에 독일과 관계를 끊었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세계의 일원’이라는 점을 내세울 수 있는 기회였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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