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승정원은 오늘날의 신문인 ‘조보(朝報)’를 발행했다. 1894년 7월8일자 조보에 실린 고종의 전교(傳敎)는 조선 멸망 직전 조정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딱히 조선 말기로 국한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의 한국사회를 묘사한다 해도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다. 고종은 당시의 조정 신료들을 지목했지만 이들 대신 우리 사회 전반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득권 세력’으로 대상을 바꾸기만 하면 별 차이가 없다.
필자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의 칼럼을 빠뜨리지 않고 읽는 편이다. 진보 계열에서는 보기 드물게 팩트(facts)에 근거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지난 8월 한 신문에 ‘교수·변호사·회계사 망국론’이라는 파격적인 글을 기고했다. “다이내믹 코리아가 어느 순간에 변화를 위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는 게 요지다.
“우리 사회의 교수·변호사·회계사들은 부끄러움을 잊었다. 이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 “(오로지) 사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제공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나라든 기업이든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사법 종사자들의 기득권 수호에 대한 칼날이 매섭다. “현직 변호사가 미래 변호사인 후배 판사, 검사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빌미로 고액 수익료 사건을 싹쓸이”한다며 (우리 사회가) 뭔들 제대로 작동하겠느냐고 질타하고 있다.
얼마 전 양승태 대법원장이 현직 부장 판사가 부패 혐의로 구속된 데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사회 정의구현의 최후 보루가 돼야 할 사법부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이 나라의 법질서가 혼란을 겪는 원인은 보다 심각하다.
법원 행정부서를 장악한 특정 기득권 세력이 사건 배정 때마다 자기네 성향에 맞는 판사에게 할당함으로써 집단 이익을 수호하고 있음에도 대법원장은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 나라에 알파고 판사가 나와야 비로소 사법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말이 시중에 떠돌겠는가.
국회는 국회대로 모든 것을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나선다. 국회 앞에서는 어떤 개혁 노력도 언감생심일 뿐이다. 관료들은 국회 앞에서 주눅 든 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늘만 괜찮으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언론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언론 역시 시민사회나 국익이야 어찌 되든 사적 이익을 위한 진실 왜곡과 선동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누구 말대로 “부패 기득권 집단”이 된 지 오래다.
귀족 노조는 이 사회 갑중의 갑이다. 이제 이들에게는 노동해방이 목표가 아니다. 무한권력만이 존재의 이유다. 기술개발이나 설비 투자를 자기네와 협의하라고 윽박지르고 조합원 인사와 신규 채용, 하도급 인원 조정조차 사전 동의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 고용 세습도 당연시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각 분야에 기득권화하지 않은 집단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기득권 확대만을 추구하며 시대 변화에 저항하려 든다. 세계가 주목하던 한국의 기업 생태계가 역동성을 잃고 침체의 늪으로 깊이 빠져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흔들리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일부 경제학자는 산업계의 리셋(초기화)이 필요하다고 하나 사회 전반이 변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충격적 사태를 맞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한국 경제가 경이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 사회 전체의 역동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왕조 패망에 이은 일제 식민지와 6·25 전쟁은 사회 구성의 완전한 해체를 초래했다. 기존 기득권 세력의 완벽한 몰락과 신진 세력으로의 대체가 전후 60여년의 사회 발전과 경제 활력의 제1 조건이 됐던 것이다.
사회는 유기체다. 피처럼 순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의 기득권 구조가 돌처럼 굳어버리면서 동맥경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우리 스스로 역사의 때가 돼버린 기득권 구조를 깰 수 있어야 한다. shinwo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