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가 하고 싶다.” 몇 달 전 김광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은 한 연극 작품의 소개 자료만 보고 선뜻 연출을 맡겠노라 답했다. ‘좋다’, ‘명료하네’…호평을 이어가던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주인공) 비 역할은 전미도가 딱 맞겠네.”
이렇게 시작된 만남, 연극 ‘비’(Bea)는 오는 11월 11일 개막을 앞두고 한창 연습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 처음 호흡을 맞춘다는 연출가 김광보와 배우 전미도를 공연이 올려질 서울 용산구 프로젝트 시야에서 만났다.
2010년 영국 초연한 연극 ‘비’는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며 안락사를 택하는 젊은 여성 비(Bea)를 통해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묵직한 소재는 마냥 눈물만 빼지 않고 유쾌함과 먹먹함을 오가며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특히 ‘비’ 캐릭터를 불치병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겉으로 보이는 비’와 그가 갖지 못한 활달한 ‘내적 자아’로 분리해 1명의 배우가 함께 연기한다. 극 초반 무대에 등장한 비는 침대에서 춤을 추는 에너지 넘치는 인물이지만, 관객은 얼마 안 가 알게 된다. 실제 비는 8년째 불치병에 신음하는 침대 위의 ‘산 송장’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많이 울겠다 싶었죠.” 김 연출의 ‘작품에 대한 첫인상’은 이랬다. 잘 짜인 희곡을 읽을수록 가슴이 아렸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움직일 수 없는 비와 너무도 활달한 비가 정말 대조적이죠. 한 인물의 상반된 모습이 정말 슬펐어요.” 그래서 전미도였단다. “밝음과 어둠의 전환이 동물적으로, 절묘하게 이뤄지는 배우”가 바로 그였다고. 사실상 1인 2역에 가까운 비 캐릭터는 베테랑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다. 전미도는 “대조적인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게 아직은 어렵다”며 “오히려 이런 면에서 비가 더 짠하게 느껴지고, 더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절망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풀어내지 않는 게 이번 연극의 핵심이다. 김 연출은 “비의 현재 상황이 절망적이고, 어찌보면 결말도 비극”이라며 “내용 자체는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게 가져가되 그 밑에서 어둡고 슬픈 감정이 배어 나오게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극에는 비와 비의 엄마(백지원), 그리고 비의 남자 간병인 레이(이창훈)가 등장한다. 레이는 비의 안락사 계획을 엄마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이자 활달한 비의 자아와 소통하며 그녀에게 마지막 웃음과 희망을 선물하는 존재다. 김 연출은 세 사람의 관계성에 주목해 이야기를 가져갈 계획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비는 침대로 뛰어올라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춤춘다. 대본은 그 모습을 ‘순수한 행복의 결정체’라 묘사한다. “죽음이란 게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최선이기에 비의 선택이 아름다운 것 아닐까요?” 전미도의 답변은 마지막 장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됐다. 김 연출도 ‘자정은 어제의 끝이고 내일의 시작’이라는 연극 ‘뙤약볕’의 대사를 읊조리며 “비가 자정이라는 상황에 놓여있는 인물로서 그에게 죽음은 삶의 연장이자 희망인 것 같다”고 거들었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에서 벗어나 조금씩 공감하며 배워가고 있다. 두 사람은 이번 작품이 관객에게도 마냥 무겁지 않은, 그러나 곱씹어볼 화두를 던지는 연극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관객은 산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전미도) “안락사를 통해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를 묻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되겠죠.”(김광보)
/사진=송은석기자